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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파리> 좋은 것들도 지나치면 역효과

‘파리’와 ‘사랑’은 최상의 조합,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들도 지나치면 역효과

나라마다 도시마다 적절하게 어울리는 단어들이 있다. 때로는 그 단어들이 관광객을 유치하거나 이미지 쇄신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만들어져 견고해지는 경우도 있다. 2004년 한국의 국가브랜드로 만들어진 ‘다이내믹 코리아’는 아마도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역동성과 한국은, 특히 매일 매일 얼굴을 바꾸는 현재의 서울에는 잘 맞아떨어지지만 정책적 차원에서 만들어져 대외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이미지다. 반면에 사랑과 낭만의 도시로서의 파리는 오랜 역사에 걸친 전방위적 문화 활동과 산업적 지원을 통해 전세계인에게 각인된 경우라고 하겠다. 스무명의 내로라하는 감독들이 참여해 만든 옴니버스 프로젝트 <사랑해, 파리>는 파리가 환기하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이미지에 실체를 입힌 작업이자 파리라는 도시를 향한 절절한 구애가이기도 하다.

열여덟개로 이루어진 에피소드들은 파리의 행정구역마다 사랑 이야기를 심어놓는다. 영화는 예술가들을 위한 전유 공간처럼 여겨지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시작된다. 감독이자 주연인 브뤼노 포달리데는 주차난과 싸우며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로 나와, 우연히 자신의 차 앞에서 쓰러진 여성과 핑크빛 로맨스를 꿈꾸게 된다. <슈팅 라이크 베컴>으로 이름을 알린 거린다 차다는 이슬람 소녀와 프랑스 소년의 풋풋한 사랑을 담아내며, 구스 반 산트는 패셔너블하며 동성애 카페로 유명한 마레 지구를 배경으로 소년들끼리의 끌림 혹은 오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코언 형제는 ‘파리의 지하철에서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마라’라는 여행서의 금기사항을 어긴 미국인 관광객, 스티브 부세미가 튈르리역에서 겪는 고충을 특유의 유머를 통해 전한다. 왕가위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했던 크리스토퍼 도일은 기기묘묘한 차이나타운의 판타지를, 이자벨 코이셋 감독은 지겨워진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려다 오히려 그녀를 더더욱 사랑하게 되는 슬픈 남자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스와 노부히로는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마음 아파하는 줄리엣 비노쉬를 빅토아르 광장에서 다시 아들과 조우할 수 있도록 해주며, 실벵 쇼메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마임 아티스트의 운명 같은 사랑 이야기를 한편의 동화처럼 들려준다.

알폰소 쿠아론은 어린 엄마가 된 딸과 그녀를 걱정하는 아버지가 몽소공원을 가로지르며 서로에게 걱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랑스런 풍경을 보여준다. <클린>의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미국에서 건너온 여배우가 자신에게 약을 판 딜러와 나누는 미묘한 교감과 허탈한 순간을 포착하고, 올리버 슈미츠는 광장에서 죽어가는 한 남자가 뒤늦게 떠올리는 사랑의 기억을 커피 향기와 함께 담아낸다. 리처드 라그라베네즈는 자극이 필요한 중년의 사랑을, 빈센조 나탈리는 서로의 목을 물어뜯는 뱀파이어들의 관능적인 사랑을, 웨스 크레이븐은 공포영화의 대가답게 자신의 전공지역인 묘지를 배경으로 신혼부부의 알콩달콩한 사랑을 그린다. 프레드릭 오뷔르탱과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공동 연출한 라탱 구역의 에피소드는 이혼을 앞둔 노부부의 애증어린 말다툼을 엿듣는 재미를 선사한다.

장편영화의 거장들이 모여 만든 대부분의 옴니버스영화들은 그들이 개인전을 펼칠 때 보여줬던 기량에 비해 실망스런 결과를 보여주곤 했다. 많은 감독들이 의기투합한 <사랑해, 파리>도 이전 옴니버스영화들이 걸었던 행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열여덟개의 에피소드가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러닝타임 속에 담기다보니 대부분의 작품은 감정의 여운을 음미하기도 전에 끝나버리기 일쑤다. ‘너무 많은 사랑은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Too much love will kill you)라는 퀸의 노래처럼 한꺼번에 쏟아지는 너무 많은 사랑 이야기의 달달함은 관객에게 다소 당황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리 애틋한 사랑이라도 너무 많으면 그 가치를 만끽하기가 벅차지는 법이니까.

그러나 종합선물세트 중에도 요긴한 품목들은 꼭 들어 있듯이, <사랑해, 파리> 중에도 특히 빛을 발하는 작품들이 있다. 월터 살레스와 다니엘라 토마스가 함께 들려주는, 정작 자신의 아이는 탁아소에 맡겨놓은 채 16구역의 고급 주택가에서 유모 역할을 해야 하는 이민자 여성의 슬픈 노래는 낭만 속에 파묻힌 파리의 그늘을 발견하게 만든다. <롤라 런>에서 속도감있는 연출력과 게임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플롯을 선보였던 톰 티크베어는 이번에도 이별로 인해 공황상태에 처한 연인들의 심리상태를 감각적으로 전달한다. <사이드웨이>로 와인 향기 가득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줬던 알렉산더 페인은 이번에는 홀로 파리에 여행 온 미국 여성의 발길을 따라 거닐며, 하나의 주체가 공간과 정서적으로 공명하게 되는 황홀한 순간을 포착해낸다. 물론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파리’와 ‘사랑’을 해석하는 감독들의 개성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특히 이 세편의 작품을 통해서 파리의 다른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파리’에 대한 영화인들의 사랑을 다시 확인시켜준 이 작품을 보면서 우리의 도시들도 언젠가 그런 사랑 고백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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