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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작고 쓸쓸한 평화 <준벅>

가족이라서 가능한 위로와 가족이기에 불가능한 이해 사이의 딜레마

(이 기사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묘사가 들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인 파티가 끝난다. 파티장을 떠나려던 어머니는 밖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아들을 보고 외친다. “뭐하고 있니? 굳이 부르지 않아도 가족이 가면 함께 가야지.” 가족이 가면 함께 가야지. 그런데 함께 갈 때 가족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준벅>은 여정이 같아도 목적지는 제각각 다른 가족 행로의 딜레마를 응시하는 영화다.

시카고의 미술품 딜러인 메들린(엠베스 데이비츠)은 화가 데이빗의 뛰어난 작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 그가 사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마을은 우연히도 메들린 남편 조지(알렉산드로 니볼라)의 고향에서 가까운 곳. 매들린은 결혼 뒤 처음으로 시가도 방문하고 계약도 성사시키기 위해 그곳으로 떠난다.

남편의 가족을 처음 만나는 일로 잔뜩 흥분한 메들린. 그러나 퉁명스런 시어머니 페그, 과묵한 시아버지 유진, 제멋대로 구는 시동생 조니(벤저민 매킨지), 부담스러운 동서 애슐리(에이미 애덤스)를 보면서 메들린은 그들이 자신과 얼마나 다른지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다.

<준벅>은 정서적으로 절묘한 균형을 잡는다. 이 영화에는 가족이라서 가능해지는 위로와 가족이기에 불가능해지는 이해가 공존하고 있다. 삶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흥분이 있는가 하면 길게 이어지는 단계에 대한 권태가 있다. 그리고 인물을 바라보는 연민에 가득 찬 시선이 있다. 그러나 그 연민은 다가가 인물을 힘껏 안아주며 능숙하게 등을 두드리려는 연민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가볍게 손을 쥐었다 놓는 연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인물을 감싸고 있는 삶의 어떤 분위기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사건을 찍지 않고 공기를 찍는다. 사건을 찍을 때도 사건 자체의 의미보다는 그 사건을 둘러싼 맥락의 의미가 훨씬 더 중요하다. 조지 부부가 작은 고향집에서 숨죽여가며 섹스를 할 때, 중요한 것은 신혼부부의 식지 않은 정열이 아니라 애써 잠을 청하며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유진 부부와 조니 부부의 거세된 열정이다.

이 영화는 작은 시골 마을에 찾아온 도시인의 이야기를 다룬 가족영화의 관습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메들린은 도시인이라서 심성이 더 메마르지도 않고, 조지의 가족들은 시골 마을 사람들이라서 더 고집스럽지도 않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박수치며 역접의 의지로 익숙하게 끝을 맺지 않고,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로 두손을 모으며 순접의 체념으로 막을 내릴 준비를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의지로 끌어낸 해피엔딩보다 체념어린 독백의 마침표가 더 위안이 되는 것은 어찌 된 영문일까.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세계 안에서도 희망과 좌절을 온몸으로 생생히 살아내는 인물로 애슐리를 연기한 에이미 애덤스의 호연이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언뜻 두드러져 보이진 않지만, 시부모 역을 맡은 셀리아 웨스턴과 스콧 윌슨의 정확하고 깊은 연기도 그 못지않게 찬사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준벅>을 통해 필 모리슨 감독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 스케치 능력을 보여준다. 아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조니가 녹화해주려다 얼토당토않게 신경질을 낼 때, 잃어버린 십자드라이버를 찾으면서 유진이 “내가 십자드라이버라면 어디로 갔을까”라고 혼잣말을 할 때, 출산의 진통을 느낀 애슐리가 “18kg을 빼야 하니까 뱃속의 아기가 컸으면 좋겠어요”라고 싱글거리며 병원에 갈 때, 캐릭터들은 최소한의 묘사만으로 관객에게 인물 이해의 단서를 또렷이 남긴다.

그러나 과연 관객은 영화의 타인들을 온전히 이해한 것일까. 조니가 조지를 느닷없이 스패너로 때리고, 페그가 베란다에서 몰래 혼자 눈물을 흘릴 때, 보는 자는 보이는 자의 마음속으로 정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일까.

결정적인 순간, 가족이 갈 때 함께 가지 않은 메들린은 뒤늦은 자책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녀가 함께 갔든 가지 않았든, 거의 차이가 없었을 것임을 암시한다. 결국 조지와 메들린은 마지막 장면에서 다른 여정을 택한다. <준벅>은 관계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순간 찾아오는, 삶의 작고 쓸쓸한 평화에 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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