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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평화에 대한 영화의 진정성 <그르바비차>
주성철 2008-01-02

지옥 같은 전쟁을 치른 두 여자 이야기가 가슴을 후벼판다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의 한 마을 그르바비차, 에스마(미르자나 카라노비크)는 12살 난 딸 사라(루나 미조빅)와 함께 살고 있다. 사라는 아버지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전사한 전쟁영웅으로 굳게 믿고 있다. 에스마는 하나뿐인 딸에게 먹이기 위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농어를 사고, 수학여행 경비 200유로를 마련해주기 위해 주변 여기저기에 손을 내민다. 시내 한 클럽의 웨이트리스로 고되게 일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건 오직 사라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는 전사자 가족의 경우 수학여행 경비가 면제된다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전사 증명서를 떼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에스마는 증명서 발급을 차일피일 미룬다. 화가 난 사라는 엄마에게 대들고, 이윽고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르바비차>는 두 모녀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품고 시작하지만 사실 그것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스니아에서 나고 자란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은 단도직입적으로 세르비아군이 저질렀던 만행을 고발한다. 그르바비차는 바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보스니아의 모슬렘 여성 2만여명이 ‘인종 청소 프로젝트’라는 무시무시한 미명하에 조직적으로 강간당했고, 10만여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전쟁영웅의 딸’이라 믿고 있던 사라는 자신이 그런 이유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가 불러오던 에스마는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배를 때려도 봤지만 생명은 그렇게 질긴 것이었다. 에스마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조그만 아이를 힘겹게 키워왔다. 영화 속에서 지워져 있는 12년의 시간을 짐작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종종 영화 속 배경으로 멀리 보이는 모슬렘 사원의 아련한 모습은 고즈넉하다기보다 처연해 보인다. 여성들이 겪었던 그 끔찍한 현실 앞에 종교란 언제나 그렇게 뒷짐을 서고 있는 것이다. 나이트클럽에서 여성 종업원들을 탐하는 남자 군인들의 모습 또한 그의 소속이 어디건 간에 에스마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렇게 남자들의 전쟁이 야기한 상처는 전적으로 여성의 몸에 새겨졌다. 2006년 베를린영화제는 보스니아 출신의 여성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에게 최고 영예인 황금곰상을 안겨줬다. 특별한 영화적 형식도, 과감한 수사도 돋보이지 않는 <그르바비차>를 택한 것은 바로 여성과 평화에 대해 대화를 건네는 영화의 진정성 때문이었다. <그르바비차>는 망각의 시대를 향하여 던지는 가슴 아픈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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