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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동시에 스산한 멜로드라마 <궤도>
심은하 2008-07-09

대화빈도 지수 신체접촉 지수 감정촉발 지수 ★★★★

두팔이 댕강 잘린 사내(최금호)가 있다. 손이 없으니 발로 살아간다. 발로 담배를 피우고, 약초를 뜯고, 기타를 튕긴다. 누구도 그를 지켜보지 않는다. 떨어져 사는 마을 사람들은 행여 그와 눈이 마주칠라치면 자리를 서둘러 피한다. 그렇게 언제나 혼자인 그에게 갑자기 그녀(장소연)가 찾아든다. 한눈에 오갈 곳 없는 처지임을 알아챈 그는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들인다. 손이 없는 그와 말을 잃은 그녀는 이날부터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옌볜TV방송국 프로듀서와 촬영감독으로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 재중동포 김광호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영화 속 두 남녀를 괴롭히는 건 육체적인 장애가 아니다. 여자는 악몽에 쫓기고 남자 또한 수시로 죄책감에 시달린다. 처음엔 서로의 고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두 남녀. 불편한 몸으로 동정과 위무를 조심스럽게 주고받던 그들은 조금씩 생채기 난 가슴을 열어 보인다.

<궤도>는 말이 없는 영화다. 아니, 말이 필요없는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녀가 말하지 못하니 그 또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침묵의 시선으로만 상대를 헤아리고 염려한다. 여자가 남자의 이부자리를 살피면 남자는 여자를 위해 자장가를 연주한다. 곰취를 캐던 그는 문득 그녀가 궁금해져서 그녀를 훔쳐보고, 그녀는 어둑해졌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창가에서 기다린다.

“시점숏은 세상과 소외되어 있는 두 사람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다.” 감독의 뜻대로 <궤도>는 그 혹은 그녀의 시점숏으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신기한 건 이 단조로운 숏의 반복이 어느 순간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그래서 감염되지 않은 사랑의 마술을 직접 체험케 한다는 점이다. 시선의 반복과 교차, 그리고 장면의 대구와 인물들의 자리 바꾸기를 따르다보면 주인공들처럼 마음의 손이 움직이고, 마음의 귀가 열리는 환각에 빠져든다.

<궤도>는 따스한 동시에 스산한 멜로드라마다. 영화의 끝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비극이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다. “세상은 결국 동그라미”라는 감독의 설명을 감안한다면, 파국인 동시에 또 시작이다. 다만 <궤도>는 상실이 복원으로, 대면이 합일로 손쉽게 귀결되진 않는다고 말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영화 속 궤도처럼 현실은 고통을 짊어진 인간들의 느린 질주, 그 자체가 아닐까.

김광호 감독은 <금호의 삶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8부작 방송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알게 된 장애인 최금호씨의 일상을 뼈대로 삼아 <궤도>를 만들었다. 실제 모델이었던 최씨가 극중 사내 역을 직접 맡아 복잡미묘한 눈빛을 내뿜는다. 23명의 스탭 모두가 조선족이라 현지에서는 ‘최초의 옌벤영화’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옌지디지털워크숍’, 영화진흥위원회의 ‘재외동포 저예산영화 제작지원’, 부산국제영화제의 ‘아시아펀드 후반작업 제작지원’ 등 남쪽 동포들의 도움으로 개봉까지 가능했다고 감독은 덧붙인다.

tip/ 촬영 도중 가장 많이 NG난 장면은 예상과 달리 영화의 첫 장면. 극중 남자가 발가락으로 능숙하게 담배를 말아 피우는 장면인데, 몸이 불편한 배우 최금호씨는 시점숏 촬영을 위해 카메라에 시선을 양보하고 자신은 머리를 한쪽으로 젖힌 상태에서 연기를 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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