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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키면서 말을 건네는 독특한 멜로 혹은 성장영화 <사과>
이영진 2008-10-15

별난 종족들의 별난 로맨스 지수 ☆ 평범 인물, 평범 대사, 그럼에도 매력 지수 ★★★☆ 개봉 연기 지수 ★★★★

혼기가 꽉 찬 현정(문소리)은 부모의 여행 제안을 뿌리치고 오랜 남자친구 민석(이선균)과 단둘이서 몰래 제주도로 떠난다. 프러포즈를 예감하며 한껏 부풀어 있던 현정, 그러나 그녀가 받은 것은 이별 통보였다. 서울로 돌아온 뒤 현정은 “내 자신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면서 갑자기 뒤돌아선 민석의 주위를 서성이지만 변심한 남자는 웃음을 다시 보여주지 않는다. 실연의 통증이 조금씩 무뎌지던 어느 날, 현정은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구애하던 상훈(김태우)에게 조금씩 호감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 알면 무슨 재미냐”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결심을 굳힌 현정은 결국 상훈과 결혼한다. 신혼생활은 달콤하기만 할까. 현정은 결혼이 또 다른 도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상훈은 현정과 마련한 보금자리가 조금씩 갑갑하다. 급기야 상훈이 지방도시로 전근을 가게 되고, 때마침 사라졌던 민석이 다시 현정 앞에 나타나면서, 세 남녀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사과>는 심심한 영화다. ‘특별한’ 남녀가 ‘특별한’ 계기로 ‘특별한’ 사랑을 완성하는 로맨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현정은 그저 평범한 직장 여성이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매력을 갖고 있지도, 반대로 심각한 콤플렉스를 지니지도 않았다. 연애를 했으니 결혼을 하고, 결혼을 했으니 출산을 해야 하는 삶의 궤적을 기꺼이 고대하는 그런 여자다. 현정의 곁을 떠난 민석이나 현정 곁에 선 상훈이 천성적으로 삐뚤어진 ‘나쁜 남자’도 아니다. 현정의 가족들이 등장하지만 <사랑과 전쟁>류의 자극적인 갈등 조장과도 거리가 한참 멀다. 그렇다면 세 남녀의 인연 뒤편에 뭔가 구미를 당길 만한 사연이 존재할까? 오래전 민석이 현정을 만난 것도 “이 건물에서 제일 예쁘잖아요”라는 촌스러운 방식으로 현정에게 접근한 상훈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사과>는 현정이 두 남자 중 어느 품에 안길까보다 흔히 사랑이라 부르는 관계 혹은 감정에 물음표를 던진다(극중 현정의 가족은 도드라지진 않지만 현정이 믿는 사랑이 실은 사랑이 아님을 여러 차례 암시하는 존재들이다).

<사과>의 ‘맛’은 이 같은 무모한 용기에서 나온다. 현정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사과>는 평범한 남녀관계의 앞뒤 전모를 들려주는 대신 다큐멘터리처럼 관객이 직접 눈앞에 벌어진 사태를 캐묻도록 유도한다. 과감한 생략 탓에 초반만 하더라도 보는 이들은 인물의 심리를 역산하는 데 골몰하지만, 어느덧 ‘왜’라는 인물들의 질문에 보는 이들이 어서 빨리 대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현정은 민석에게 ‘왜’ 나를 떠나느냐고 따져묻고, 상훈은 현정에게 ‘왜’ 내가 싫으냐고 화를 내고, 돌아온 민석은 남의 아내가 된 현정에게 ‘왜’ 내가 그때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상대에게 끊임없이 ‘왜’를 들먹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했을까’라고 되묻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똑 부러지게 답하지 못한다. 관계의 파국 앞에서 사랑은 이제 추궁과 심문의 대상일 따름이다. 민석은 침묵하고, 상훈은 회피하고, 그러면서 현정도 그토록 확신했던 ‘사랑’이 허상의 신기루였음을 어렴풋이 감지한다.

사랑은 인간의 숭고한 본능일까. 필요에 의해 사후적으로 학습된 습관일까. 영화의 마지막. 시나리오의 결말과 달리 현정은 민석과 상훈 둘 중 누군가의 곁에 남겠다고 결심하지 않는다(따라서 멜로영화의 흔한 플래시백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소음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수화기를 들고 “미안해”라고 말할 뿐이다. 뒤늦게 그녀의 미안함을 전해들은 이는 누구였을까. 극중 상황처럼 이제는 남남이 된 상훈이었을까. 아니면 등 뒤의 민석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었을까. <사과>는 모든 것을 고백하는 대신 삼키면서 말을 건네는 독특한 멜로 혹은 성장영화다.

tip/ <사과>의 대사들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군더더기도 없고, 수사도 없다. 평소 사람들이 쓰는 말을 꾸미지 않고 고스란히 따왔다. 강이관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 실제 수십명의 커플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는 극중 캐릭터와 대사 등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는 카메라

<사과>의 카메라는 제한적이다. 동시에 현실적이다. 강이관 감독은 “전지적인 카메라는 싫었다”고 말한다. 인물과 배경을 상황과 함께 제시하는 이른바 마스터숏 또한 거의 없다. 모든 숏이 들고찍기로 이뤄졌지만, 카메라는 모든 공간을 헤집는 대신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한다. 다른 영화들에 비해 클로즈업이 유달리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강이관 감독은 “사람의 시야는 최대 135도에 불과하다. 자기 뒷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영화 속 풍경들은 대부분 현정의 제한된 시점으로만 보여진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원칙은 상대에게 투영되고 반영된 모습에서 쉽사리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영화 속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카메라 앞에 선 배우들의 능숙한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특별한 바라보기가 가능했을까. 현정 역의 문소리는 <오아시스> <바람난 가족>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등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 연기를 선보인다. 대사로 말하기보다 현정의 시선에 비친 표정으로 속내를 슬그머니 전달해야 하는 상훈과 민석 역 또한 김태우, 이선균이라는 성실한 배우들의 도움을 얻어 생동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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