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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겪는 험난한 숙명 <슬리핑 뷰티>
박성렬 2008-10-22

여자 김기덕 지수 ★★☆☆ 성추행 지수 ★★★★ 억울함 지수 ★★★★

초등학교 6학년 도연이는 호기심 때문에 사촌오빠와 금기를 깬 사랑을 나누고, 중년 여인 이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은 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본다. 불법으로 밀입국한 17살 수진은 양아버지에게 강간과 착취를 당한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서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 속 공주님 이야기가 아니다.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달리 <슬리핑 뷰티>는 운명적인 만남으로 구제받는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운명으로 맺어진 남성들의 전횡과 독선에 좌절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여자로 겪는 험난한 숙명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각 이야기를 구분짓는 경계는 계단식으로 점차 논점이 확대되는 경계이기도 하다. 예컨대 ‘근친상간’이라는 테마를 이야기하자면 ‘도연’의 이야기는 자발적인 근친상간을 묘사하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례’는 치매노인의 요청에 따라 성기를 주물러줄 것이냐 말 것이냐를 고민하는 식으로 폭력의 노골성을 점차 확대한다. 양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강간과 학대를 함께 당하는 ‘수진’의 이야기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을 최대치로 묘사하며 모든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린다. 그 단계적인 면모에 차이가 있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이야기의 중심은 언제나 남성에게 당하는 여성이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수진의 다리 사이에서 쏟아지는 벌건 피에 <슬리핑 뷰티>의 전체적인 방향성이 함축되어 있다. 이한나 감독은 여성의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한 도구로 영화를 선택했으며 그 격문의 어투는 불쾌할 만큼 남성적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사전지원작으로 완성된 <슬리핑 뷰티>는 저예산으로 연출된 독립영화 특유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아주 진지하면서 간결하고 동시에 독창적이다. 훌륭한 장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은 아니어도 깨끗하게 다듬어진 줄거리 사이에서 아름답고 명쾌한 비유가 시원한 펀치를 날린다. 묵직한 주제를 가진 영화의 특성상 불편한 장면도 더러 있거니와 여기에 맞고 날아갈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부류가 크게 나뉘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신예감독의 데뷔작으로서는 꽤 괜찮은 영화고 여성감독의 작품으로서는 좀 놀라운 영화다.

tip/<슬리핑 뷰티>의 포스터에 쓰인 문구 하나가 상당히 문제적이다. ‘이한나 감독은 여자 김기덕이다!’ 맞는 말인지는 스스로 확인해야겠지만 김기덕과 유사한 점이 있긴 하다. 가족단위 관람이 어렵다는 점, 세 이야기 모두 배경으로 낙후된 촌을 택하고 있는 점, 그리고 숙명을 암시한다는 점. 감독의 다음 작품이 좀더 뚜렷한 대답을 내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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