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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감독의 옴니버스 멜로영화 <연인들>
김용언 2008-12-03

옛사랑을 떠올리며 한숨지을 지수 ★★★★ ‘독립영화 단편’에 대한 공포의 선입견을 느낄 지수 ★ 느릿하게 산책하고 싶어지는 지수 ★★★

김종관 감독은 독립영화계에서 선명한 브랜드 파워가 있는 거의 유일한 감독이다. 그의 단편 중 단 한편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당신도 이해할 것이다. 짧게는 4분, 길게는 13분가량에 불과한 그의 단편들에선 영화 내적인 시간 자체도 짧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영화 속 현재의 과거와 미래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 전후로 캐릭터들의 머릿속에서 혹은 심장에서 어떤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는지 우리는 전부 알아낼 수가 없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미지의 작은 영역이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지는 관객의 호기심을 끈질기게 유지하는 영화적 호흡이야말로 김종관 감독의 힘이다.

<연인들>은 김종관 감독이 8년 동안 찍었던 17편의 단편 중 11편을 고른 옴니버스 멜로영화다. 이 11편은, 김종관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17편 중 가장 콤팩트한 작품 중심으로, 그리고 연대순이 아니라 내가 생각했던 어떤 감정선의 흐름에 따라 배치”했으며, 동시에 “지금까지 만들어온 영화들의 카테고리를 가장 골고루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연결된다. 이를테면 <연인들>의 시작은 아직 채 분명한 감정으로 무르익지조차 못한 짝사랑의 찰나를 포착한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다. 다음엔 꺼벙한 소년과 당돌한 여자가 느닷없이 키스를 나누는 사랑의 시작이자, 프랑스 누벨바그의 전성기에 바치는 연서와도 같은 <누구나 외로운 계절>, 그리고 사라지는 기억에 대한 막연한 불안 <메모리즈>가 이어진다. 그 직후 결코 좁혀지지 않는 두 사람의 거리감, 뜻모를 미소가 허공 속에 덧없이 사라지는 여름의 눅진한 공기를 담은 <낙원>이 반드시 배치되어야 했다.

그리고 차례대로 이 세계에 흠집을 내고 상처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심정이 난폭하게 발로하는 <드라이버>, “우린 다시 시작하지 못하겠지… 왜 돌아갈 수 없는 거지?”라며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의 내면이 황량한 겨울바다 풍경과 겹치는 <모놀로그#1>가 이어진다. 오지 않는 연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소녀의 달콤한 외로움 <영재를 기다리며>, 열차를 (반강제적으로) 한참 기다려야만 하는 외대역 1호선 승강장에서 서로 마주보는 두 남자 <길 잃은 시간>, 건널목을 사이에 둔 두 연인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낸 <운디드>는 고독의 서로 다른 깊이를 전한다. 미지의 남자의 휴대폰 컬러링을 엿듣다가 다음 순간 “여보세요?”라는 남자의 목소리에 당황하는 소녀를 클로즈업하는 <헤이 톰> 이후, ‘연애해야 한다’는 트렌디한 강박에 사로잡힌 평범한 남자의 희극적인 독백 <올 가을의 트랜드>로 끝맺는다. 기대와 열망이 두려움과 자신없음, 뜻하지 않은 분노로 일그러진다. 허망한 좌절과 고독이 잇따르고, 그 다음엔 되풀이에 지나지 않더라도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두근거림으로 이어지는 청춘의 한 시절이 이렇게 완성된다. 11편의 단편은 이렇게 단단한 유연성으로 느슨하게 모나드의 집합을 일궈나간다.

김종관 감독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표정과 희미한 몸짓과 앰비언스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오히려 뚜렷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지는 미세한 불안감과 서스펜스가 존재했다. 이를테면 그의 초기 대표작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선 소녀의 흔들리는 표정과 호흡, 필름이 툭하고 떨어지는 작은 소음만으로 순정과 서스펜스가 뒤얽힌 영화적 쾌감을 만들어냈다. 이후에도 주인공의 말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공기의 감각, 짧은 시간과 좁은 공간이 빚어내는 예기치 않은 긴장감의 밀도, 텅 빈 프레임을 자유롭게 들고나며 혹은 거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치된 아주 작은 오브제 하나만으로도 상황을 짐작게 하고 특정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환기로 이어진다. 최근작 <헤이 톰>이나 <올 가을의 트랜드> 등에선 무의미한 수다와 몽상에 가까운 독백(이라기보다는 방백)이 늘어났지만, 그마저도 김종관 감독의 본질적인 미지의 텅 빈 영역을 가볍게 건드리고 스쳐갈 뿐,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영화 안에 걸어들어가도록 권유하는 영화적 힘을 지우지 않는다. 관객은 <연인들>을 보면서 그가 풀어내는 미지의 매혹, 아름답고도 불안한 정서의 힘, 끝없이 제시되는 삶의 작은 수수께끼들을 직접 호흡하고 풀어야만 할 것이다.

tip/ <사랑니> <가족의 탄생> <좋지 아니한가> 이전에 <폴라로이드 작동법>이 있었다. 이 단편 하나만으로 단박에 영화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배우 정유미의 아름다움은 지금 보아도 눈부시다. 독립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연기 활동을 펼친 배우 양익준과 정보훈, CF 속 빨간 망토 소녀로 인기를 모은 김가은,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남성 패션모델 홍종현 역시 김종관의 시선 속에서 특별한 매력을 부여받는다.

김종관 감독 “감정의 흐름 따랐다”

단편들의 순서는 어떤 기준으로 배치했나.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돌이켜보면 예전 작업이 다음 작업에 연계되는 식이었다. 전 작품에서 물음표가 생겼던 부분을 다음 작품에 넣다 보니 감정적인 선에서 흐름이 생기는 것 같더라. 연대순이 아니라 그 감정의 흐름에 따라 순서를 정했다.

초기작과 현재 작품들 사이의 변화된 지점을 스스로 느끼는지. 내용적인 측면에서나 스타일적인 면에서나 바꿔보고 싶은 것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하나 짚어가다보면 점점 새로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내 작업물도 범위가 넓어진다. 그 점을 느낄 때마다 즐겁다.

작품을 구상할 때 주로 어떤 지점을 가장 먼저 생각하며 시작하는가. 최초엔 감정이 있다. 그리고 나를 건드리는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 윤곽만 드러나면 전체적인 내용이나 설정들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것들은 가려지기 때문에 좋은 것들도 있다. 가려지기 때문에 표현도 중의적이 되고, 하나가 아닌 둘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준비하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 장편을 계속 준비했는데 잘 안됐다. <소년>이 많이 미뤄졌고, 저예산으로 준비하던 다른 멜로영화가 있었는데 이건 꼭 겨울에 찍어야만 했다. 하지만 투자 시기를 놓치면서 역시 미루게 됐다. 지금 준비하는 건 부산영화제에서 지원받은 장편 <바닷가에서>다. 또 <모놀로그#1>을 찍을 당시 연계된 다른 단편들을 더 찍어서 ‘다이얼로그’ 옴니버스 장편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서로 다른 커플 다섯쌍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시작부터 이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큰 이야기로 느슨하게 연결된다. 하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다섯 개의 다른 이야기로 구성되는 관계에 관한 영화다. 이것도 완성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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