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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 개막작 <슈팅 라이크 베컴> 감독 거린다 차다
2002-07-18

나, 안정환 광팬이에요

“축구영화라고? 여자애가 축구를 한다고? 그것도 인도 여자애가?” 인도계 영국 소녀가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는 <슈팅 라이크 베컴>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투자자들은 모두 도리질을 쳤고, 프로젝트가 성사될 가능성도 옅어만 갔다. 그런데

기획부터 완성까지 5년의 세월을 건너, 드디어 올 4월 첫선을 보인 이 영화가 개봉 주말 스코어 200만파운드로, 영국 박스오피스를 점령했다.

“그러게 앞이 막히면 돌아가야 한다니까. 베컴의 킥처럼.” 영국에서 활동중인 유일한 아시아 여성감독, 그리고 최근 도처에서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는 스타감독 거린다 차다 감독의 말이다.

올 부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슈팅 라이크 베컴>의 거린다 차다(Gurinder Chadha)

감독은 이전에는 <해변의 바지> <왓츠 쿠킹> 같은 아트하우스 계열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도계 영국 여성’이라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 세대와 인종과 문화와 성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오해하고 좌절시키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 <슈팅 라이크 베컴>은 그중에서도 유쾌하고 떠들썩한 축제의 열기를 품은 영화. 낙천적이고 후덕한 인상의 거린다 차다 감독은

<슈팅 라이크 베컴>이 월드컵 열풍을 제대로 타고 있는 게 여간 반갑지 않은 눈치다. 영화제 개막식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월드컵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슈팅 라이크 베컴>의 인도 개봉일과 부천영화제 개막일이 거의 일치한다고 들었다. 인도 프리미어를 포기하고 부천행을 결심한 이유는.

한국을, 서울을 꼭 한번 방문해 보고 싶었다. 평소 김치나 된장국 같은 음식을 즐기는데다, 월드컵을 통해 본 한국의 이미지가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인도는 여러 번 들른 적이 있어서, 굳이 이번에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축구팬은 아니지만, 월드컵 사랑은 남다르다던데.

축구는 남성적인 경기라서 개인적으로 별 매력을 못 느낀다. 그렇지만 월드컵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특성이 반영되는 행사이기 때문에

꽤 흥미롭다. 월드컵에서 다른 나라를 응원하는 것은 대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영국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독일이 우승할까봐

무척 걱정했고,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응원했다. 뭐니뭐니해도 이번 월드컵의 하이라이트는 세네갈이 프랑스를 이겼을 때와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겼을 때다. 속이 다 후련하더라.

안정환의 팬이 됐다고 들었다. 베컴은 2순위로 내려가는 건가.

세상 모든 여자들이 동의하지 않을까 싶은데, 안정환은 너무 잘생겼고, 경기도 잘한다. 영국에 올지도 모른다는 얘길 들었는데, 열혈팬 하나는 확보한 셈이다. 안정환이 한국의 베컴이고, 베컴이 영국의 안정환이라 할 만큼 공통점이 많은 것 같다. 부인이 미스코리아라면서? 모르긴 몰라도, 빅토리아 애덤스보다 미인일 거다. (웃음)

<슈팅 라이크 베컴>은 최근 영국 최고의 흥행작이었다. 그렇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처음부터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작정이었기 때문에 관객이 어느 정도 들 것이라는 기대는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큰 히트를 기록할 줄은 몰랐다. 할리우드영화에 밀려 찬밥 신세를 못 면하던 영국영화가 서서히 상승 분위기를 타고 있던 시점에 개봉한 덕도 있었다. 문화적인 다양성과 조화를 이야기한, 흔치 않은 영화라는 사실이 매력적이었을 수도 있겠다.

스토리의 큰 줄기로 영국의 축구와 인도의 결혼을 함께 다루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이전의 두 작품 <해변의 바지>와 <왓츠 쿠킹>은 예술영화로 분류된다. 비평적으로는 성공을 거뒀지만, 상업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 다음 영화만큼은 멀티플렉스에 걸고 싶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중문화가 축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초적인 그 스포츠에 인도 여자아이를 등장시킨다면 어떨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되면, 내가 속한 두 나라의 강박관념을 연관지어 얘기할 수도 있겠더라. 영국은 축구에, 인도는 결혼에 집착하니까.

제목을 <슈팅 라이크 베컴>(Bend It Like Beckham)이라고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

베컴에게는 공을 차는 특별한 기술이 있다. 그가 찬 공은 직선으로 가지 않고 완만한 커브를 그린다. 어린 소녀가 세상에 던져졌다는 것도 비슷한 상황이다. 세상은 그녀가 직구를 날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뭔가 걸림돌이 있게 마련이고, 그걸 피해 굽이굽이 돌아가야 한다. 베컴의 기술과 소녀의 운명. 완벽한 매치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시대에 달라진 여성성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요즘 십대들은 나의 십대 때와 달리, 남성만의 것이라고 구획지어진 것에 도전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마초적인 것을 동경하고 과시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베컴이라는 아이콘, 마초적이라기보다는 여성적인 축구스타의 미덕을 돌아보길 바랐다.

베컴이 자기 이름 빌려준 보람을 느끼는 것 같나.

처음 각본 작업을 시작한 것이 1998년이다. 월드컵이 열리던 해인데, 베컴이 퇴장당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에 졌고, 한동안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 모두가 그를 싫어하고 비난했는데, 너무 딱했다. 나라도 힘을 주고 싶어 ‘헌정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그의 변호사와 연락해 이름 사용 허락을 받았다. 그 베컴이 지금은 거의 신이다! 인기 없을때 허락받았기 망정이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다. (포스터를 가리키며) 저기에 사진도 못 넣지 않았나. 하지만 상관없다. 무엇보다 고맙고 기쁜 것은, 그가 영화를 맘에 들어했다는 것이다. 스토리도 뛰어나고, 인도 전통문화 묘사도 탁월하다고 말해주더라.

엔딩 크레딧에 스탭과 배우들이 한데 어우러져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 장면을 덧붙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현장을 그토록 유쾌하게 리드할 수 있었나.

날씨 덕이다. 촬영 내내 날씨가 너무 좋아서, 현장 분위기도 덩달아 떴던 것 같다. 그들 대부분이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아주 좋아했던 데다 촬영이 원활히 돌아가는 걸 느끼며 즐거워했다. 처음엔 장난삼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흥겹고 자연스럽게 잘 나와줬다. 비밀 하나 밝히자면, <토이 스토리>와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당신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아시아 여성감독이다. 그런 정체성이 영화작업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하다.

예전 같으면 차별도 있었을 거다, 영화를 만드는 돈이 대부분 현지 남성에게서 나오다보니, 사고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흥행 성공으로 존재를 입증하기 전까진 펀딩이 힘들다는 사실이다. 정체성의 문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영국인, 인도인, 그리고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BBC> 리포터로, 다큐멘터리스트로 활동했다고 알고 있다. 어떻게 극영화로 옮겨오게 됐나.

뉴스 리포터가 된 건, 미디어의 힘을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TV 등의 영상매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다 내 얘기가 하고 싶어져서, 영화로 선회하게 됐다. 저널리스트로서의 경험들은 극영화를 만드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각본을 쓰고 신을 만들고 할 때는 ‘포인트’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고, 방송일을 하면서 익힌 편집감각으로 극에 리듬을 주곤 한다. <슈팅 라이크 베컴>에서 소녀들의 축구경기와 인도풍 결혼식의 교차편집 장면이 대표적이다.

흔히 우리가 발리우드 뮤지컬이라 부르는 마살라 장르의 영화들도 자주 보고 영감이나 자극을 구하는지.

아버지가 인도 뮤지컬을 워낙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 덩달아 많이 봤지만, 언제부턴가 스토리도 스타일도 진부하게 느껴져서 싫어하게 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종류도 다양해지고 질도 좋아지고 있다. 내가 발리우드영화에서 영향을 받냐고? 반대다. 오히려 그들이 내 영화음악을 카피하려 든다고 들었다.

개인 프로덕션에서 독립적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하던데,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는지.

아니, 지금은 없다. 모두가 내게 제작비를 대려 하니까. (웃음) 운이 참 좋다고 느낀다. 첫 장편 <해변의 바지>는 펀딩문제로 5년에 걸쳐 작업했다. 그런데 지금 추세로는 예전에 써서 쌓아둔 시나리오도 하나씩 볕을 볼 것 같다.

이제까지 주로 문화와 세대, 성과 성정체성이 충돌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그렸다. 앞으로 하고자 하는 얘기도 그것인가.

아마도, 아마도 그럴 거다. 그게 영화감독으로서 내가 보는 세상의 풍경이니까. 난 사람들에 관심이 많다. 그들 사이에서, 그들 안에서 가치관과 성향들이 부딪히고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것을 보곤 한다. 그런 변화가 좋다. 모든 형태의 스테레오 타입을 깨고,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길 바란다.

차기작으로 진행중인 프로젝트가 흥미롭더라.

뮤지컬을 준비중이다. 우리끼린 ‘British Bollywood Musical’이라 부른다. 영국의 음악과 인도의 전통음악을 결합한 아주 특별한 뮤지컬을 준비중이다. 인도, 영국, 미국, 세 나라에서 촬영할 예정인데, 아직 뮤지션 섭외가 덜 끝났다. 또 다른 하나는 <향신료 아가씨>(Mistress of Spices)라는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미국에 사는 인도 여성 이야기인데, 향신료 가게를 찾은 사람들의 사연과 욕망을 다룬다. 2주 뒤쯤, 주연 배우감을 찾으러 인도에 갈 계획이다.

<슈팅 라이크 베컴>이 부천 개막작으로 첫선을 보이는 데 이어, 8월 말에는 한국 극장가에 걸린다.

비영어권 국가에서 이 영화를 보는 건 나도 처음이다. 내 영화에 자막이 얹혀진 걸 보는 기분이 어떨지, 나도 궁금하다. 관객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더 궁금하다. 흥분된다. 포스트 월드컵 열기가 좀더 오래 이어져, 영화 흥행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웃음) 한국에 여성축구가 얼마만큼 활성화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미력하나마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 영국 개봉 당시 여성축구 관련 단체의 전화번호를 포스터에 넣었더니, 문의전화가 엄청나게 쇄도했고, 결과적으로 여성축구 붐이 일기도 했으니까.

글 박은영 cinepark@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