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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임의 FM영화음악>의 정은임
사진 이혜정오정연 2004-03-24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만드는 사람들

1995년 4월1일. 새벽 1시. 2년5개월 만에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이하 <정영음>)이 우리의 곁을 떠났다. 이후 그의 방송중단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추측이 난무했고, PC통신 붐을 타고 그의 복귀를 촉구하는 청취자들의 운동은 끊이지 않았다. 이후 8년 반이 지난 2003년 10월 21일 <정영음>은 돌아왔다. 정은임의 방송재개 소식이 알려지자, 과거의 청취자들이 모여 있던 한 인터넷 카페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로부터 5개월이 흘렀다. 그러나 새벽 3시라는 살인적인 방송시간대, 예전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진 영화계, 그리고 10년에 가까운 세월의 어쩔 수 없는 간극 등은 <정영음>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는 없음을 의미했다. 이 모든 것들은 고스란히 정은임과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극복해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이제 프로그램은 초반의 혼란을 극복하고, 각 코너들은 자신의 색깔을 내기 시작했으며, 내부적으로는 시스템이 어느 정도 갖춰지고 자리를 잡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제는 정은임 개인을 둘러싼 흥분을 걷어내고, 그가 겪었던 변화들이 지금의 <정영음>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정영음>은 당시 등장한 시네필들과 미묘한 상호 작용을 하면서 시너지효과를 냈고, 당시의 청취자들은 일종의 세대를 이뤘다. 정성일씨도 얼마 전에 방송에 출연하여 이와 관련된 말을 했는데.미국에서 공부할 때, 팬덤에 관심이 많았다. 대중문화는 생산자보다는 수용자들이 적극적으로 주체가 되어서 다시 생산에 영향을 끼치는데, 그런 면에서 <정영음>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 이전의 80년대의 거대 담론이 90년대의 영화와 문화로 집중된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고, 그 속에 <정영음>이 있었던 거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다만 그때도 내가 그 시대 속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항상 굉장히 평범한 인간이다. 시기마다 시대정신이라는 게 있고 그걸 사람들이 정의하는 데 나는 항상 그 분석에 딱 들어맞았다. 80년대에는 거대 담론에 휩싸이다가 90년대에는 예전에 내가 그토록 부정하던 할리우드영화를 사랑하게 되고, 문화운동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되고, 그 이후에는 일상성과 개인을 생각하게 되고. 지금은 환경을 고민하고. 결국은 내가 살아오면서 하나하나 피부로 느꼈던 깨달음이 바로 시대 정신이었다.

<정영음>을 다시 시작하면서 이 시점에서 프로그램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나.사실 방송시간대가 워낙 엄청난 시간대라서, 청취율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겁낼 게 없었다. 그래서 남들이 전혀 다루지 않는데, 우리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영화와 그 주변 얘기는 무조건 다루자고 생각했다. 인터뷰 대상도 그런 식으로 선택했고. 그래서 김동원 감독도 <송환>이 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때 바로 인터뷰를 했다. 또 한 가지는, 우리는 영화잡지처럼 영화계 내부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쪽에서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작가도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우왕좌왕했다. 스탭들이 나한테 “그런 얘기는 요즘 관객이 싫어해요” 하면, 나는 “청취자들이 아무리 싫어해도요, 이 얘기 안 하면 내가 아닌 거예요” 하면서 싸웠다. 그때는 서로 잘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는 시스템도 어느 정도 생기고, 서로 호흡도 잘 맞는다. 그리고 예전부터 마이너리티쿼터나 예술영화전용관 문제, 멀티플렉스의 횡포 등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야겠다고 생각했고, 5개월 동안 이야기도 많이 했다. 사람들은 너무 자주 얘기하는 거 아니냐지만 나는 아예 그 문제를 자꾸 얘기해서 지겹게 만들고 싶다. 이제는 내 피부에 와닿는 것만 말하고 싶기 때문에.

10년 전과 비교해서 <정영음>을 하면서 느낀 변화가 있다면.섭외가 힘들어졌다는 점. 일단 섭외 대상을 몇 단계 거쳐야 연락할 수 있고, 나름대로 영화 전문 프로그램임에도 성사되기가 힘들다. 관계자들이 대중에게 노출되는 효과적인 기회만을 생각하는 것 같다. 홍보에만 관심이 있고, 영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돼 있다. 방송과 잡지는 달라서, <씨네21> 같은 영화잡지와 하는 인터뷰는 자신들의 가치를 높인다고 생각하면서 방송은 오로지 연예프로그램에만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처럼 사각지대에 있는 프로그램은 꺼리는 거 같다. 물론 이런 측면은 방송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10년 전 <정영음>을 지금 평가한다면일단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열심히 하긴 했다. 그때 매일의 방송을 기록했는데, 오프닝은 뭘 했고, 어떤 노래를 틀었는지부터 미처 소개하지 못한 청취자들 이름도 나중에 언젠가는 언급하려고 적어놨다. 근데 그때 멘트들은 이제와서 보면 좀 우스울 때가 있다. 그때만 해도 지식이 독점되던 시기라서 별거 아닌 것도 굉장히 포장해서 얘기하거나, 민족주의나 유치한 애국주의적인 멘트도 많았고. 당시에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참 감성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훨씬 이성적이 됐다.

10년 동안 유학과 결혼, 출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하나.원래 공부하겠다는 마음보다는 우리나라 아닌 다른 곳에 살아보고 싶고,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젠 그런 환상이 많이 깨졌고, 도피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한다. 그 어디에도 도피할 곳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결혼은 서른한살에 했는데 당시에는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생각도 못했다. 또 그때는 젊은 여자로 회사생활을 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고 미혼여성에게 가지는 고정관념들도 싫었다. 사실 결혼 자체는 별로 힘들지 않은데, 애기를 낳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출산으로 인해서 많은 것들을 얻고, 또 잃었는데, 얻은 것은 겸손이다. 애를 낳고 나서 이렇게 어려운 일이 있나 싶어 주위를 돌아보니 다 엄마 아빠들이었다. 아, 이 사람들이 다 이 과정을 거쳤단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는 건 이젠 영화를 볼 때도 부모 입장에서 본다는 점이다. <이웃집 토토로>를 볼 때도 거기서 애들이 ‘엄마 유령이 나오는 집인데 괜찮아요?’라고 물으면, 엄마가 ‘유령이 나오면 신나겠다’라고 말하지 않나. 근데 나는 애한테 만날 12시면 “유령 나온다, 빨리 들어가서 자라” 그런다. 그래서 그 영화를 보면서도 부모를 보면서 감동받고, 나도 정령이나 자연친화적인 걸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 스탭들은 날더러 올드하다고 난리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면서, 내 안에 유치함이 휘발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축적된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모르던 것들도 알게 되고.

지금은 ‘내 일기장 속의 영화’라는 코너로 부활했지만 과거에 ‘내 인생의 영화’라는 코너가 있었다. <로저와 나> <허공에의 질주> 등이 포함돼 있었던 본인의 목록에 세월이 흐르면서 추가된 영화가 있다면.<화양연화>와 <올드보이>. 아이를 낳고 내 시간을 갖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하루에 책 몇 페이지, 영화 한편씩은 꼭 보겠다고 결심했다. 골방에다가 TV랑 오디오 시스템을 갖춰놓고 애 재우고나서 새벽 2시부터 <화양연화>를 봤는데, 중간에 애가 깨버렸다. 그래서 애한테는 우유병 물리고, 헤드폰 끼고 영화보면서 나는 계속 울고…. 그 상황이 나의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웃겼다. 그리고 <올드보이>는 보면서, 세월의 변화를 많이 느꼈다. 예전에도 박찬욱 감독이야 워낙 똑똑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 나는 뭘 했나 싶어서. 아나운서로서 점점 커다란 프로그램을 맡지도 못했던 나는 10년 전과 똑같은 자리에 왔는데 말이다. 물론 원래 그런 거에 대한 욕심은 없지만, 어쨌든 예전에 알던 사람들의 놀라운 발전 같은 것이 느껴져서 참 놀랐다. 박찬욱 감독 자신의 강렬한 취향은 줄어들었지만 상업영화로서 자신의 취향이 대중과 상당히 많은 접점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팬들과 함께 자신과 프로그램도 성장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을 것 같다.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요즘은 내가 예전보다 훨씬 과격해졌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과거의 구호나 선언이 일상의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왔다고 할까. 예전에 사람들이 나한테 문제를 들춰낸다고 했다. 근데 난 문제를 그냥 두지 않을 뿐이다. 이제는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뭔가 하나씩 해보자는 생각을 한다. 노조 여성부장도 그런 이유로 맡았고, 거기서 진행 중인 사내여성들을 위한 탁아소 건립문제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절실한 가까운 일부터 하겠다는 마음으로 추진 중이다. 방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만드는 사람들인 것 같다. 내가 성장할 수 있다면, 내가 기획하고 만드는 프로그램도 자연스럽게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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