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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힘을 빼는 방법을 배웠다
주성철 사진 오계옥 2009-11-20

한국 관광과 휴대폰 홍보용 단편영화 찍은 감독 류승완

많이 궁금했다. 장편 <내가 집행한다>를 비롯해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 진행 중이던 류승완 감독이 외도(?)를 했기 때문. 그럼에도 하나같이 인상적인 결과물이라 ‘역시 류승완’이라는 감탄이 나왔다. 그는 최근 모토로라 신제품 ‘모토 클래식’ 출시 마케팅의 일환으로 액션단편 <타임리스>를 만들었다(홈페이지 ‘motoklassic.com’에서 본편을 무료 감상할 수 있다).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처럼 인터뷰가 삽입된 다큐멘터리 느낌의 <타임리스>는 시간을 초월한 장인 정신을 담고 있다. 세계적인 톱스타가 된 왕년의 스턴트맨 케인 코스기와 한때 그의 선배였던 현재의 무술감독 정두홍이 새로운 액션영화의 배우와 무술감독으로 다시 만난다는 내용이다. 땀냄새 가득한 액션과 남자들의 말없는 우정이 그의 영화다운 짙은 여운을 남긴다. 류승완 감독은 그보다 앞서 한류, 음식, 쇼핑, 세련된 문화라는 네 가지 주제로 중국인에게 한국을 홍보하는 총 4편의 한국관광공사 광고 영상을 단편 형식으로 만들기도 했다. 송승헌과 박은혜, 그리고 중국 톱스타 리광제와 고원원이 출연한 이 단편들 역시 류승완 감독 특유의 재치와 액션 연출이 돋보였다. 이처럼 장편 프로젝트를 쉬면서 2009년을 보낸 그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케인 코스기는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올해 초 케인 코스기가 한 프로젝트를 제안했으나 좀 아니다 싶어서 거절했는데, 어떤 식으로든 내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 있으면 감독인 나한테 다 맞출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얘기를 써보고 싶다고 했고 케인도 좋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는 다른 작가와 함께 진행 중이다. 그러던 중에 모토로라의 제의를 받게 된 거고 함께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 <타임리스>를 하게 됐다. 그렇게 결정하고 보니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사실 액션배우와 무술감독의 갈등은 손쉽게 예상할 수 있는 건데, 그들 관계가 약간 엉뚱한 것은 의사소통도 힘든 상황이고 과거에도 뭔가 인연이 있었다는 거다. 모토로라도 내수용 브랜드가 아니니까 흥미로워했고 그런 게 강점이 됐다. 말로는 의사소통이 안되는 두 사람이 몸으로 뭔가를 극복한다는 게 좋았다.

-두 남자가 갈등에 직면해서 함께 벌판을 질주하는 장면의 느낌이 좋더라. =그런 게 몸으로 살아가는 남자들의 방식이 아닐까 했다. 사실 그건 예전부터 찍고 싶었던 장면이었다. 어떤 아는 분이 예전에 결혼하고 나서 군 입대를 앞두고 너무 고민이 많아 상담을 하려고 선배인 정두홍 무술감독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정 감독이 대뜸 추리닝을 던져주면서 갈아입고 뛰라 해서 그렇게 한참을 아무 생각 안 나게 뛰었다더라. 그래서 힘들게 막 뛰고는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는데 문득 ‘내가 여기 왜 왔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상담 한 거 아무것도 없이 머리가 백지 상태가 되어서 다음날 군대 갔다고 하더라. 굉장히 오래전에 당사자한테 들었던 얘기인데 그게 정 감독의 방식이었나 보더라. 그 이야기가 머리에 오래 남아 있어서 나중에 영화에 한번 써먹어야지 했다. 나로서는 어깨 힘 빼고 굳이 싸우지 않고도 클라이맥스를 연출하는 방식도 터득했고. (웃음)

-케인 코스기는 원규 감독의 <DOA>(2006)에도 출연한 적이 있고, 이른바 ‘닌자영화’의 황제 쇼 코스기의 아들이라는 점이 유명하다. 그와의 작업은 어땠나. =사실 나는 <DOA>도 못 봤고 그가 출연한 일본 전대물도 접할 기회가 없었다. 나 역시 쇼 코스기의 아들이라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브랜든 리 같은 사람인가?’ 하면서 말이다. (웃음) 그리고 케인 코스기가 어릴 때 나온 닌자 시리즈의 기억이 어렴풋이 나서 뒤늦게 유튜브로 다시 찾아봤다. 그는 국적은 미국이지만 일본계이고 또 본인의 에이전시도 미국에 있지만 미국·홍콩·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는 사람이라 정체성 혼란도 있고 그러다보니 외국팀과의 작업 자체를 무척 흥미로워했다. 게다가 쇼 코스기라는 거물의 2세라는 것도 더해져 굉장히 흥미로운 캐릭터다. 또 전대물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다 가면을 쓰고 출연한 작품들 아닌가. 일본어 발음도 일본에서 들으면 ‘교포 발음’이라고 한다더라. 올해 웅흔흔 감독의 <코웹>(2009)에 출연한 걸 보면 홍콩 무술팀과 친한 것 같더라. 그런 그가 이제 40대가 됐지만 여전히 욕심도 있고 뭔가 새로운 걸 찾고 있는 듯했다.

-그가 아버지와 사이가 굉장히 안 좋다고 하던데. =나도 들은 얘긴데, 대단히 안 좋다고 하더라. 부모가 이혼을 했는데 케인이 어머니를 보살폈다. 쇼 코스기가 그런 케인의 태도를 못마땅해하면서 자신의 도장도 물려주지 않았고, “내 아들은 비겁한 놈이다. 도장을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면서 언론 플레이까지 했다고 하더라. 최근에 또 가장 충격적인 건 원래 <닌자 어쌔신>에 캐스팅됐는데 쇼 코스기가 아들과 함께 출연할 수 없다고 해서 무산됐다더라. 그런 얘기를 들어보니 아버지와 아들의 성격이나 외모가 전혀 딴판인데다 어려서부터 얼마나 혹독하게 자랐겠나 싶더라.

-케인 코스기는 한국 액션영화 현장이 어떻다고 하던가. =이렇게 테이크를 오래 가는 현장은 처음이라고 했다. 실제로 기량이 탁월하지만 케인에게는 현장에서 써먹을 수 없는 액션들이 있었다. 워낙 정통적인 방식으로 무술을 훈련한 사람이라 서울액션스쿨에서 테스트를 하는데 스턴트맨들이 되게 아파했다. 뒤꿈치로 때리고 발차기 파워도 가공할 정도라서. 스턴트맨들이 합을 안 맞추려고 하더라. (웃음) 본인도 홍콩과 일본, 한국 방식이 너무 다르다고 했고 다 찍고 난 다음에는 왜 한국 액션팀이 ‘액션은 감정’이라고 말하는지 알겠다고 하더라. 그게 참, 해본 사람들은 아는 건데, 실제로 영화를 보면 힘에 부쳐서 케인의 다리가 풀리는 것도 보인다. 그렇게 기존에 안 하던 방식으로 하는 건데도 싫은 내색 한번 안 하고 젠틀하게 역할을 소화했고, 그러니까 당연히 스탭들이 그를 좋아했다. 열심히 했다 안 했다, 그런 차원을 떠나서 나도 그에게 감동했다.

-<타임리스> 액션 연출의 컨셉이라면. =뭔가 좀 다른 걸 해보고 싶어 고민하다가 처음에는 미식축구 방식의 강도 높은 스턴트나 전쟁영화 같은 장면을 떠올렸다. 여기저기 폭발물이 터지고 점프하고 그러면서 긴 코스를 한 테이크로 쫙 가는 건데 그걸 찍으려면 1분짜리 한 테이크로 예산 전체를 쓰겠더라. (웃음) 그러다 정두홍 감독이 여기저기 장애물을 설치하고 퍼즐 경기를 하는 듯한 운동감을 주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지금의 구도가 나왔다. 구조물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찍기 힘든데 스턴트맨들이 정말 잘해줬다. 그런데 제일 아쉬운 건 액션장면을 찍기로 한 5일 중 마지막 날 너무 날씨가 안 좋았다는 거다. 4일 동안 더할 나위 없이 좋던 날씨가 5일째 갑자기 흐려졌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 끝내주게 촬영했을 텐데 그게 제일 아쉬웠다.

-우정출연한 황병국, 이경미 감독의 연기가 놀라웠다. 황병국 감독은 “우리가 뭐 대종상 받을 일 있냐. 빨리 대충 가자”는 남기남 감독의 대사도 따라하던데. =굳이 남기남 감독 얘기가 아니더라도, 액션영화 현장이라는 게 드라마 연출과 달리 찍어야 할 숏이 굉장히 많다. 그러다보니 해 떨어지는 순간이 되면 정신병자처럼 소리치고 던지고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대충 가자고 해놓고는 나중에 막 후회하기도 하고. 그 영화 속 감독에게는 내 모습도 약간 있다. (웃음) 황병국 감독은 지난해 미쟝센영화제에 나온 <125 전승철>에 출연한 걸 보고 캐스팅했는데 너무 잘해주셨다. 안 그런 척하면서 설정도 많이 해서 나중에 정두홍 감독이 왜 그렇게 설정을 많이 하냐고 짜증을 내더라. (웃음) 사실 모토로라쪽에서는 내가 감독 역할을 해주길 바랐는데 나는 그렇게 못했을 것 같다. 황병국 감독은 지난해 ‘<추격자>의 중국집 배달부 버전’이랄 수 있는 단편 <오프라인>을 만들었는데 영화 정말 좋다. 이경미 감독은, <미쓰 홍당무>를 보면 이런 걸 연출한 사람은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게 하지 않나? (웃음) 과자 먹으면서 얘기하는 장면은 정말 예상을 뛰어넘는 최고의 연기였다. 그 두 사람이 살린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임리스>에 앞서 뜻밖에 한국관광공사 영상물 네편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위기에 빠진 회사 ‘외유내강’을 위해서였나. =음, 아무래도 그렇다. ‘세이빙 마이 컴퍼니’라고나 할까. (웃음) 양심있는 고용주로서 직원들 퇴직금은 마련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언제든 또 같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어쨌건 그 영상물을 작업하면서 보릿고개는 넘겼고 개인적인 학습도 됐다. 작품들을 좋게 봐주신 분이 많아 다행이긴 한데 여건이 좋았으면 더 멋지게 만들었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컨셉이 완전히 다른 4편을 중간에 부산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심지어 중국 배우까지 데리고 5회차 촬영으로 끝내야 했으니까.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현장편집도 없이 갔는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찍을 때도 그렇게는 안 했던 것 같다. (웃음)

-개인적으로 배운 건 뭔가. =레드원 카메라에 대한 이해를 높였고…. 자세히 보면 영화 속 총기 화염이 다 CG다. 현재 미국에선 드라마는 다 그렇게 CG로 한다고 하더라. 사실 갈수록 그런 것에 적응해야 하는데 잘 모르겠다. 그렇게 다 CG로 하니까 현장에서는 재미가 별로 없다. 요즘엔 칼 휘두를 때 나는 피나 심지어 칼끼리 부딪히는 것도 위험하다고 가짜 칼이 아닌 CG로 할 정도니까. <타임리스>는 거기에 완전히 역행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정두홍 감독도 내 옆에 와서는 “이거 그냥 CG로 가자, 자기야” 그런다. (웃음) 어쨌건 액션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갈수록 현장에서의 몰입도가 줄어드는 상황이 되었다. 나 스스로 굳어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것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편이라 흥분도가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동안 준비 중이던 <내가 집행한다>는 어떻게 되고 있나. =완전히 덮은 상태는 아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관심 가지는 회사가 한 군데 있어 계속 조율 중이다. 그리고 작업방식을 좀 바꿨다. 몇개 프로젝트를 펼쳐놓고 치밀하게 준비를 해놓은 상태에서 되는 것부터 가는 거다. 그게 현명한 방식인 것 같다. 오래전 발표한 <야차>나 케인 코스기와 함께 하기로 한 작품도 거기에 있는 거고.

-한국영화계가 침체기다 보니 안전한 코미디영화 외에 액션영화를 비롯한 장르영화가 외면받는 분위기라고 생각하나. =사실 올해 7월 즈음해서는 공중부양 직전까지 갔다. 아무것도 되는 게 없으니까 가만히 앉아 공중부양해서 형광등까지 갈 뻔했다. (웃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들고 이제 10년이 됐는데 지금까지 이 정도 위기는 없었다. 작품들이 무산되고 하니까 너무 힘들었고 주위 환경을 공격적으로 봤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내 작품이 투자 못 받는다고 생각하면 ‘땡깡’부리는 것밖에 안된다. 물론 영화계 전반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이 다 숨어버린 측면은 분명히 있다. 좀더 안전하고 보편적으로 다수의 감성을 맞추려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환경 탓을 해봐야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리고 관광공사 작품은 정말 생계적인 요구에 의해서 했다 치더라도 <타임리스>는 자신있게 ‘류승완의 2009년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100분짜리 작품은 아니어도 나를 이루는 여러 요소와 취향, 그리고 변화까지 반영된 작품이다. 나의 그 어떤 영화보다 자유롭게 만들었고 현장의 흥분과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 모습을 읽으니 어서 당신의 다음 장편을 보고 싶다. =나도 빨리 내 장편을 보고 싶다. (웃음) 이제 좀 힘을 빼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영화가 잘되고 못 되고가 내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만드는 과정 자체를 최대한 즐기려고 한다. <타임리스> 만들면서 거의 ‘앵꼬’ 직전이던 내 에너지 게이지가 충만하게 올라간 상태다. 나의 유아기 7년을 빼면 지난 30년 동안 어떻게든 영화와 인연을 맺고 그 일을 해왔고 지난 10년간은 감독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힘들어도 현장에 있는 게 행복하지 싶더라. 뭐니뭐니해도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가 제일 좋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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