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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견자는 88만원 세대, 이몽학은 386세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이준익 감독

이준익 감독은 볼이 홀쭉해졌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촬영현장에서보다 살이 더 빠졌다. 그는 개봉을 앞두고 잠을 제대로 못 잔다고 했다. “내 의도와 관객의 관전 포인트가 다를까봐 걱정이다.” 관객이 울고 웃는 지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준익 감독 아닌가. 그의 말은 엄살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이준익 감독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고민을 한 보따리 털어놨다.

-원작자는 어떻게 봤다고 하던가. =VIP 시사회 때 영화를 보셨는데, 후다닥 헤어지느라 이야기를 많이 못 나눴다. 애초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만화는 만화일 뿐이다, 게다가 15년 전 만화 아닌가, 구애받지 말라고 하셨다. 원작을 맘껏 재구성하고 해체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던 때는 4년 전이다. =원작은 견자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며 황정학과의 ‘버디 트루기’가 덧붙여져 있다. 4년 전에 타이거픽쳐스 조철현 대표와 최석환 작가가 쓴 시나리오는 원작에 많이 가까웠다. 그때는 굳이 영화로 찍어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 다시 끄집어냈다. 정치적인 현실 등이 많이 달라져서다. 정치에 광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 또한 외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순 없잖은가. 무의식적인 반응이라고 해야겠지.

-견자는 꿈없는 지금의 10대, 20대 젊은 세대를 대변한다고 말한 적 있다. =억압에 대해 반발하지만 정작 꿈이 없는 세대지. 내 식대로 말하면 ‘약정세대’다. 꿈이 없고 미래가 없다. 꿈이 있어도 약정에 묶여 있다.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시급 2500원(??)짜리가 되는 세상 아닌가.

-이몽학도 어떤 세대, 세력을 뜻하는 것 같다. =굳이 말하자면 386이지. 나도 따지면 386에 가까운 세대다. 한때 세상을 바꿔보자고 했던 피 끓는 청년들이 이제는 어깨에 힘주는 층이 됐잖아. 난 그들이 지금의 신세대를 약정으로 묶어놨다고 본다. 한신균에게 꿈도 없는 놈이라고, 백지한테서‘넌 꿈이 없잖아’라고 힐난을 들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던 견자가 마지막에 왕의 자리에 앉아보고 허탈해하며 이몽학에게 “네가 왕이 된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아”라고 말하는 것은 386세대에 대한 부정(否定)이다.

-견자라는 캐릭터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케팅 포인트가 황정민, 차승원에 맞춰져 있으니 아무래도 견자가 잘 안 보인다. 사실 지단이 있고, 루니가 있고, 박지성이 있다고 해도 축구 볼 때 관객은 공을 쫓는다. 견자는 일종의 공이다. 황정민이 드리블하다, 센터 라인 근처에서 백지랑 투패스를 하고, 마지막에 페널티어 부근에서 견자는 이몽학에게 패스한다. 황정학과 이몽학에 초점을 맞추면 화자를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디테일들이 소실되는 측면이 있다. 시사회 끝나고 피드백하면서 많이 느꼈다.

-개봉 시점이 원래는 설이었다. 개봉이 연기되면서 후반작업 일정은 충분했겠다. =애초 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왕의 남자> 때와 비교해도 후반작업 프로세스가 너무 많아졌고, 복잡하다. 지금까지 후반작업을 2개월 이상 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엔 4개월이나 했다. <왕의 남자>는 3일 편집했는데 이번엔 편집만 한달 했다. 그러다보니 자꾸 다른 사고가 개입하더라. 결국 이야기를 더 압축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몇몇 신을 덜어냈다. 전엔 빼고 말고 할 게 없었지. 찍은 대로 고스란히 가져다 붙였으니까. 네명의 주인공들이 해체되는 지점과 과정이 더 선명해진 것 같다.

-결말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을 것 같다. <황산벌> <왕의 남자>의 결말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내 이전 영화들은 모두 ‘관계맺기’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다. 해체의 연속이다. 절망의 바닥까지 두려워 말고 가보자, 이런 거지. 다른 버전이 있긴 했다. 이몽학이 견자와 함께 <내일을 향해 쏴라>처럼 끝내는 거였다. 근데 그게 거짓 같았다. <왕의 남자> 찍고 나서 마지막 장면이 거짓된 희망 같았다. 관객은 환호하는데 나는 반성했다. <왕의 남자>는 낭만주의적 판타지다. 죽어가는 자들의 비극을 치장한 것이지. 이번엔 그걸 다 빼고 싶었다.

-<황산벌>과 <왕의 남자>는 역사에서 비껴나서 말한다. 정면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감독의 입심이 잘 발휘됐다. 반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정면 돌파한다. 대사든 인물이든 은유라고 하기엔 너무 직접적이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직유다. 은유는 산을 넘어갈 때 굽이굽이 되돌아간다. 반면, 직유는 터널 뚫고 가는 거다. 게다가 <왕의 남자>에서 은유의 미덕은 이미 써봤잖아.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자기 긍정은 자기 연민이다. 부정해야 새것이 나온다.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어도 내일의 문을 열어야지. 이번에도 은유의 온화한 공간 안에 머물렀으면 매너리즘이라고 했을 거 아냐.

-감독으로서 은유의 쾌감과 직유의 쾌감은 어떻게 다른가. =은유는 피해갈 곳이 많다. 찍으면서 자기만족이 개입한다. 반대로 직유는 의심이 커진다. 내 안에서 벌써 불안하다. 보는 사람들마다 개인차가 큰데, 내 관점과 다르면 X되는 거지. 은유는 대충 묶어서 가면 되거든. 에두르면 다 고개 끄덕이게 되는 것이고.

-상업영화감독으로서 직유의 위험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원래 비가 오면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기질이 있다. 바지가 다 젖을지라도. 그게 천진성이지. 나이 먹고 사회적인 매너가 노련해져도 인간에겐 본질적인 천진성이 있다. 난 천진성이 인생의 보석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장화 신고 웅덩이 밟았다면 이번엔 맨발로 가보자, 했다. 내 함정에 내가 빠진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배우들과 캐릭터를 조율하는 과정도 좀 달랐을 것 같다. =구체적인 디렉션은 주지 않았다. 다만 이몽학은 쿨하게, 견자는 핫하게, 황정학은 웜(warm)하게, 백지는 웨트(wet)하게 갔으면 했다. 20부작 드라마도 아니고, 각 인물들이 개인적인 사연을 다 늘어놓을 순 없었다. 시대의 꼭대기와 바닥을 다 보여주기 위한 총체극을 만들겠다고 맘먹었을 때 인물의 내면까지 샅샅이 보여줄 순 없다고 봤다. 다만 시선의 주고받음을 통해 감정을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이몽학을 두고 너무 평면적으로 그려졌다고 하는데, 이몽학이 어떤 인물인지 직접 주입해서 보여주기보다는 관계 인물들을 통해 드러내려고 했다. 방짜쟁이든 이장각이든 심지어 황정학도 이몽학을 사랑한다. 이몽학에게 한양 가지 말라는 황정학의 말이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들리지 않나?

-이몽학이 초반에 견자를 찌르는 장면은 좋았다. 이름 모를 풋내기를 찌르지만 실은 자신을 찌른 것 같은 느낌이 전달되더라. =차승원에게도 견자는 ‘너의 어린 시절이다, 너는 지금 너를 찌르는 거다’라고 말해줬다. 뒤에 견자의 칼을 이몽학이 받을 때 웃잖나. 준 대로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웃는 거지.

-전작들과 비교할 때 서사의 흐름이 리드미컬하진 않다. =리듬을 못 잡은 게 아니라고. 마지막 장면의 감정 수위를 감안할 때, 스타트부터 인물들의 감정 수위와 온도를 높여야 한다고 봤다. 비등점 혹은 임계점부터 시작해서 그걸 넘어서는 이야기다. 시작부터 아우성인 것도 그 때문이다. 관객이 극장에 들어와서 시동을 걸 시간을 주어야 하는데 동인, 서인 하며 정신없잖아. 워밍업이 없는 영화지. 대동계 해체해, 를 시작으로 정신없이 넘어가는데 여기서 못 따라오면 처진다. 관객이야 황정학과 견자가 티격태격하는 장면을 좋아할 텐데, 그거 내가 왜 모르겠나. 마당극이야 내 장기인데. 하지만 내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기가 싼 X에서 콩나물 빼먹는 거랑 뭐가 달라.

-황정민이나 차승원처럼 관객이 이미 인지하고 있는 배우들은 비등점을 올려놓고 가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진 않는 것 같다. 반면 백성현과 한지혜는 아무래도 힘들었을 텐데. =백성현은 선배 배우들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밀리지 않고 끝까지 따라붙었다. 한지혜는 중간에 등장해야 해서 불리했다. 설정 따라 감정을 축적했던 다른 배우들하곤 다르니까. 첫날부터 웨트하게 시작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이렇게 하다간 큰일난다고 겁을 많이 줬고, 다음날 가슴 치는 장면을 다시 찍었는데, 황정민이 스탭들 다리 사이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라.

-첫 장면은 도대체 무슨 렌즈를 쓴 건가. 핀이 안 맞는다고 관객이 오해할지도 모른다. =누진다초점 렌즈다. 카메라가 픽스되어 있는데, 얼굴 한쪽만 포커스가 맞는다. 컷 안에서 포커스가 이동하는 거지. 정정훈 촬영감독이 아이디어를 냈는데, 관객이 영화의 템포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인물들의 울렁이는 감정을 드러내기도 좋았고.

-정정훈 촬영감독과의 작업은 처음이다. 배우뿐만 아니라 스탭들도 이번에 다 바꾸었는데. =사랑스럽지, 정정훈. 7월에 들어가는 <평양성>도 같이 하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 <부당거래> 찍고 있어서. 과감한 게 맘에 든다. 안전한 선택은 안 한다. 인물 바스트로 찍을 때 35mm 렌즈 쓰면 핀 날아갈 위험도 없는데, 포커스 맞추기 어려운 85mm 끼워서 인물을 살리려 든다. 자신없으면 못하는 거지.

-<평양성>은 얼마나 진행됐나. =시나리오 나왔고 투자 결정 직전이다. 제작비를 70억원 예상했는데, 투자사에서 45억원으로 줄여보자고 해서 컨셉을 바꿀까 싶다. <황산벌>의 8년 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망하는 이야기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세 아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 속에 단 한번도 침략 받은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평양성이 함락되는 상황을 코미디로 그릴 생각이다. 요즘 난 모든 정치를 코미디로 본다. 흔히 후진국은 정치권력이 세고, 중진국은 경제권력이 세고, 선진국은 문화권력이 세다. 우리도 정치, 경제를 코미디로 즐길 수 있어야만 선진국이 되지 않겠나.

-북한 사투리가 나오나. =‘다 빠개버리라우’, 당연히 사투리 나오지.

-이번엔 북·미 갈등인가. =고구려하고 나당연합군 이야기 한다니까. (웃음) 아, <황산벌>의 거시기는 나온다. 신라 병사로. 당시 신라 병사 앞에 전진 배치된 이들이 다 백제 출신이었다.

-사극은 계속 찍을 건가. =끝까지 할 거다. 동북아 3국 중에 일본과 중국은 구별하지만 서양에서 여전히 한국은 잘 모르잖아. 영웅을 치켜세우는 일본, 중국과 달리 우리는 기질상 영웅을 인정하지 않는 전복의 역사다. 그걸 소재 삼아서 사극을 계속 만들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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