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인터뷰
[임순례] 인권과 생명권은 하나다
김혜리 사진 최성열 2010-07-16

동물보호 옴니버스영화 <동물과 함께 사는 세상> 제작 총지휘, 연출하는 임순례 감독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날아라 펭귄> 가운데 한편이라도 본 관객이라면 능히 짐작할 것이다. 임순례 감독은 경쟁사회가 뒤돌아보지 않는 패자와 약자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통에 예민하게 감응하는 그녀가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익을 대변할 목소리조차 갖지 못하는 동물 복지에 마음을 기울이고, 풀 한 포기와 꽃 한 송이로부터 쉽사리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은 “어떤 존재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 조건은,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 혹은 대화를 나눌 능력의 여부가 아니라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1년째 동물보호 시민단체 카라(KARA Korea Animal Rights Advocates)의 대표로 일하고 있는 임순례 감독에게도 동물의 권리 보호는 감정적인 ‘애호’의 문제를 넘어 세상에 존재하는 부당한 억압과 착취의 일부에 반대하는 문제다. 불교적 세계관이 바닥에 흐르는 신작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출연 공효진)의 후반작업 중인 임 감독은 지난 6월5일 동물보호 옴니버스영화 <동물과 함께 사는 세상>의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제작 총지휘와 한 에피소드의 연출을 맡는다고 발표했다. 농림수산식품부가 제작지원하고 박흥식(<인어공주>), 송일곤(<마법사들>), 오점균(<경축! 우리사랑>) 감독이 임순례 감독과 더불어 20분가량의 단편을 연출하는 <동물과 함께 사는 세상>은 2011년 극장 개봉한다.

-신작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의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나. =5월에 촬영을 마쳤고 곧 편집을 마무리해 10월쯤 개봉한다. 소를 데리고 각지를 돌아다녀야 하는 로드무비인데 도중에 구제역이 발생하는 바람에 우시장이 폐쇄되고 소의 이동이 제한돼 어려움을 겪었다. 소의 자연수명은 30년인데 30개월이 넘으면 ‘성장임계치’라 해서 사료값이 고깃값보다 더 들기 때문에 도살당한다. 우리 영화에 출연한 소는 송아지 때부터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해 카메라와 사람에 친숙한 10살짜리인데 스탭들 합친 것보다 필모그래피가 화려하더라. (웃음) 우리 작품 찍는 도중에도 다른 드라마에 겹치기 캐스팅됐다.

-<날아라 펭귄>에 이어 우연히도 동물이 제목에 들어간 영화를 연달아 만든 셈이다. =<날아라 펭귄>과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찍고 동물 옴니버스도 함께할 예정인 박영준 촬영감독(<> <마법사들>)이 지하철에서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가 안부를 묻기에 “나 펭귄 끝나고 소 하는데 다음에는 개를 해야 할 것 같아”라고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뭐 하는 사람인가 쳐다보더란다. (웃음)

-박영준 촬영감독과는 어떻게 만났나. =PD를 맡았던 <여행자>의 우니 르콩트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처음 소개받았고, 송일곤 감독 작품을 촬영했을 때 사석에서 만났다. 충북 괴산에서 오래된 한옥을 고쳐 농사지으며 사는 분인데 자연친화적인 태도가 몸에 뱄다. 앵글에 나뭇가지가 걸리면 자르는 대신 줄을 매어 들어올린 뒤에 풀어준다. 개미굴이 보이면 “폴리스라인 쳐서 스탭들 못 밟게 해”라고 하기도 한다. (웃음)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기획하며 박영준 촬영감독이 아니고선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동물과 함께 만드는 영화는 강압적 수단을 쓰지 않기로 결심하면 촬영 세팅 마치고도 2~3시간을 마냥 기다려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 마인드를 서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9년 7월부터 동물보호 시민단체 카라(KARA)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워낙 동물을 좋아해 몇살까지 영화를 만들지 모르지만 이후에는 동물을 위한 운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어렴풋이 해왔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유기견 한 마리를 통해 동물보호단체와 카라의 전신인 ‘아름품’을 알게 됐다. 2007년에 카라의 대표 제의를 받았지만 7년 만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준비할 때라 사양했다. 2008년 1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개봉하고 인도 다람살라 여행을 갔다가 법회에서 들은 “깨달음은 실천으로 비로소 완성된다”는 말이 계기가 됐다. 10년 뒤에도 내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때는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지금보다 내가 덜 유명하여 운동에 도움되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또 과연 내가 365일 24시간 영화만 생각하고 다른 일은 절대 할 수 없는 형편인가 자문해 보니 꼭 그렇진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본업인 영화를 통해서도 동물보호운동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언제 했나. =막연히 개를 소재로 한 좋은 영화를 만들어 계몽도 되고 많은 관객이 들어 그 수익을 동물에게 환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동물과 함께 사는 세상>은 우연한 기회였다. 카라의 대표로서 주무부처를 방문했다가 유기동물은 동물보호 관점이 아닌 국가관리 차원에서도 골치아픈 문제라는 말을 들었다. 이와 관련해 캠페인을 하려고 하니 동물 좋아하는 배우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는 요청에 이어 홍보예산을 공익광고보다 영화 한편에 쓰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국가 예산은 연말까지 집행해야 하니 장편은 역부족이었고 여러 감독을 모아 옴니버스로 하면 어떻겠냐고 역제안해서 성사됐다.

-제작을 지원하는 부처가 환경부나 복지부, 인권 관련 부처가 아니라 농림수산식품부라는 점이 다소 의외였다. 동물권리 보호운동이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과 어긋나기도 하고. =기획은 농림수산식품부이고 재원은 마사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안다. 처음엔 고민이 됐다. 동물의 권리를 다루다보면 육식의 욕망을 적정하게 통제하자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고 육식을 위해 동물을 기업식으로 사육하는 열악한 환경을 언급 안 할 수 없는데, 축산농가의 반발이라는 딜레마가 있다. 한데 부처 관계자들도 농장동물도 좋은 환경에서 키워 고통을 최소화하며 도살하는 것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진의는 인도적 측면이 아니라 인간 먹을거리의 위생적 관리 차원이 아닐까 짐작되지만.

-메시지가 정해져 있는 캠페인성 영화를 만든다는 건 더 널리 더 선명하게 전달한다는 목적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므로 감독으로서 조금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다. 더구나 인권영화 <그녀의 무게>와 <날아라 펭귄>을 이미 만든 뒤이기도 하다. =내게 그런 우려는 없다. 어차피 내가 만들어왔고 만들려는 영화에는 사회적인 발언이 내포돼 있는데 공익적 목적을 가진 영화들의 경우 제작자가 먼저 나서주는 셈이니 자연스럽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동물과 함께 하는 세상>에는 임순례 감독 외에 송일곤, 박흥식, 오점균 감독이 참여한다. 각자 합류한 동기와 현재 기획을 소개한다면. =뜻밖에 동물을 좋아하는 감독을 수소문하기 어려웠다. 생활이 불규칙하고 촬영 들어가면 집을 장기간 비우는 직업 특성상 동물을 키운다는 게 힘드니 다들 유년기의 추억만 있더라. 합류한 감독들은 동물 권리에 대한 구체적 견해가 맞아서가 아니라, 동물과 인간의 교감이라든지 동물의 생명권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소중하다는 믿음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에 동의하고 재미있게 받아들인 분들이다. 박 감독과 송 감독은 반려동물과 인간의 교감을, 오 감독은 떠돌이개와 만난 노숙자를 그릴 것 같다. 편당 제작비는 6천만원 정도다. 내 전공은 원래 개인데(웃음) 다른 분들이 모두 개를 다룰 것 같아 다른 동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마음이…>처럼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그린 작품은 상업 영화권에 이미 있었으니, 이 프로젝트는 농장동물과 실험동물의 문제까지 다루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이번 시리즈는 동물영화의 존재를 알리는 정도로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다음 기회가 되면 분화된 주제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한다. 예컨대 종일 피를 뽑히는 수혈견을 통해 실험동물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고 길고양이 특집도 할 수 있을 거다. 어쨌든 초기 단계지만 우리나라에서 동물의 복지, 생명권에 대해 말할 기회가 처음 주어진 셈이다.

-동물이 학대받는 이미지도 불가피하게 포함될까. =장기적 인식 변화가 필요한 분야인 만큼 DVD로 제작해 학교에서 상영하는 등 대중상영 기회가 많을 터라 시각적으로 잔인한 부분은 걸러지게 될 거다. 만약 그런 설정이 있더라도 직접적으로 비추지 않기로 했다.

-동물에게 가해지는 불필요한 고통을 전하는 이미지는, 보기에는 힘겹지만 그만큼 변화를 이끌어내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숀 몬슨 감독의 다큐멘터리 <Earthlings>는 인간에게 이용되는 동물의 참혹한 실상을 견디기 힘든 영화지만 채식에 대한 많은 관객의 태도를 바꿨다. =<더 코브: 슬픈 돌고래의 진실>도 보기에 괴롭지만 돌고래 쇼나 고래 고기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경우다. 카라 사이트에서도 <더 코브…> 정도의 완성도를 갖고 개 식용 문제를 다루면 효과가 크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한국의 동물영화도 진전되다보면 언젠가 그런 지점에 다다를 것이다.

-동물과 환경 보호는 결국 인간의 한없는 욕망을 통제하는 문제로 귀결되는데, 이를 설득하는 길은 멀다. 그 전 단계에서는 동물과 환경의 착취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도 해로움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현재 동물보호운동이 전략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이를테면 비인도적인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주며 키운 동물의 고기가 얼마나 건강에 해로운지, 개고기가 얼마나 비위생적인지를 알린다거나.

-동물 실험도 불필요한 실험이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보고를 읽은 적이 있다. =불필요한 실험이 많을 뿐 아니라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다. 농장동물은 보건관리라도 받지만 실험동물은 위령제만 치러주면 그만이다. 실제로 동물실험이 불필요한 경우도 있고 필요하다 해도 그렇게 많은 개체수를 실험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다. 개의 다리를 부러뜨렸다가 붙이고 다시 부러뜨리기를 반복하는 예도 있다. 특히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비슷한 요소가 있다는 비글종 개와 영장류의 경우 희생이 막대하다. 우리나라도 최근 동물실험윤리위원회가 생겨 감시 시스템이 도입되는 단계다.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가깝다면 육체적, 정신적 고통 역시 유사하게 느낀다는 점이 자연히 고려돼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가보다. =과거에는 흑인이 백인과 유전자가 다르다고 여겨 함부로 억압하고 착취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진보적 과학자들이 흑인도 백인과 유전자가 같음을 입증해 노예해방의 과학적 근거로 쓰였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 동물은 인간 못지않은, 때로 더 뛰어난 직관과 감수성을 보여준다. 날 때부터 떠돌이였던 개에게 먹이를 주다가 건강이 악화돼 마취총으로 포획해 구조한 적이 있다. 자존심이 강한 개였는데 마취되어 잡히니까 긍지가 상해 며칠이고 단식투쟁을 하더라.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는데 감정이 무척 풍부하다. “어떤 여배우도 너 같은 표정이 없다”고 말해줄 때도 있다. (웃음)

-한국에서 동물보호와 관련해 가장 시급히 인식을 제고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보나. =반려동물을 먹는 문화다. 인간과 가장 친밀한 동물의 생명권에조차 무심하다면 소와 돼지가 어떤 환경에서 사육되고 어떤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는지 관심을 갖기 힘들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짤막한 사슬에 평생 목이 묶여 한여름에 짜디짠 짬밥을 먹고 물도 제대로 못 섭취하며 살다 1년이 못 돼 죽임을 당하는 개들이 있다. 배설물을 치우기 귀찮다는 이유로 바닥까지 철조망으로 엮은 ‘뜬장’에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누며 연명하다 도살된다. 인간이 좀더 아름다워지고 건강해지고 미각의 가짓수를 늘리겠다는 욕망 때문에 동물의 생명권을 짓밟는 일은 재고돼야 한다. 심지어 자신의 화풀이를 위해 유기견을 연달아 입양받아 학대하고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개들의 내장에는 커터칼날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반려동물을 때려잡아 먹는 풍경에 익숙해서 아무 죄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이번 ‘고양이 은비 사건’도 그렇지만 동물학대에 대한 최고형은 벌금 500만원인데, 지금까지 그 금액을 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보적인 인사들도 동물보호운동에는 관심없는 경우가 많은데. =약자의 권리를 위한 시민운동은 보통 진보 좌파 지식인과 연계해 힘을 얻는데, 그런 분들도 문화적 상대주의를 내세워 동물의 권리에는 무심한 경우가 많다. 진보적 매체에서도 별로 다뤄주지 않아 어렵다. 인간중심적 사고의 벽이다. 인권과 생명권은 하나의 맥락이다. 인간에게 허기와 갈증,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바라는 본능이 있다면 다른 종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다만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인권감수성처럼 동물의 생명권에 대한 감수성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동물과 함께 사는 세상>은 자신이 영화를 통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 가운데 어떤 자리를 차지하나. =동물이건 인간이건 지금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온 이유, 그리고 여기서 서로가 맺는 인연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비단 동물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무슨 의미로 한 생을 살고 가는지 궁금하다.

관련인물

장소협찬 퍼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