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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예술과 문학 섹션: 소설가의 문학 수업

1.

잡지는 요물이라 한번 만들면 자꾸 만들고 싶어진다니까. 시작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다름씨는 함께 잡지를 만들자며 꼬드겼다. 시도, 소설도, 인터뷰 섭외까지 알아서 해야 했고 심지어 돈도 꽤 드는 일이었다. 이것은 초대를 빙자한 영업에 가까워보였고 지역과 여행사를 그만둔 이후에 잡지는 두번 다시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여전히 나는 예술과 문학 따위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다름씨는 편집장을 시켜줄 테니 잡지 발행에 필요한 돈을 내달라고 했다. 수중에 돈이 없지는 않았지만 뉴욕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모아두던 것이라 고민이 되었다. 이 돈은 조금 다른 미래를 그리며 모으던 돈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내색하지 않았지만 계좌에 켜켜이 쌓아두는 자본의 축적은 더이상 미래를 발산시키는 게 아니라 정해진 미래로 수렴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이 돈을 쓴다는 것은 더이상 나에게 정해진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으므로. 결국 뉴욕으로 돌아가는 대신 서울에서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예상 가능한 미래에서 인간은 자신을 잃는 법이니까.

첫 번째 인터뷰를 하기 위해 건입동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소설가와 온라인으로 만났다. 꽤 오랫동안 몇권의 책을 냈지만, 최근에서야 알음알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였다. 사실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표현도 상대적인 개념인데 요즘은 ‘꽤 유명한 잡지입니다’라거나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님입니다’라고 소개할 때마다 대다수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름도 못 들어봤어요’ 할 때가 일쑤다. 이게 진짜 유명한 건지 점점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묻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쓴 소설이 인기를 얻었고, 하지만 하루키나 베르베르처럼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은 아니고, 그래도 어여삐 본 편집자 덕에 바로 후속작을 계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꼬박 10년 동안 아무도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은근히 가족들은 그만하면 되었다고 눈치를 주고, 책임져야 할 아이가 태어나고 생계도 미래도 불투명해지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기에 지역 여기저기를 누비며 글쓰기 수업을 하며 살았다는 이야기. 그래도 이번 작품이 잘돼 다행이에요. 계속 쓸 수 있어서요.

아니, 그렇게 힘든데 왜 계속 소설을 썼어요?

그러게요. 왜 계속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2.

잡지는 출간조차 하지 못했다. 다름씨와 나는 표지 디자인부터 인터뷰이 선정, 심지어 폰트 크기까지 사사건건 충돌했다. 우리는 돈은 날려도 관계는 날리지 말자고 악수하고 잡지 따윈 만들지 않기로 했다. 예상할 수 있는 미래에서 인간은 자신을 잃는 법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법이다. 인터뷰한 소설가를 다시 만난 건 서울에 도착하고 나서 한참 뒤다. 우연히 참여하게 된 독서 모임에 잠깐 얼굴을 비추고 갈 거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MJ입니다.

그는 요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는 과거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패션도, 헤어스타일도, 글쓰기 수업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도. 소설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도 굳이 나서서 아는 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로 했다. 모임이 마무리되고 밖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작가는 조용히 내게 다가와 아는 체를 했다.

혹시 인터뷰?

Yes.

그는 내가 하던 일을 모두 관두고 서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놀랐지만 퍽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다. 민성씨, 늦었지만 다시 만난다면 이걸 꼭 물어보고 싶었어요. 제 인터뷰를 성심성의껏 하셨는데 아무 데도 올리시지 않았더라고요. 원래 잡지 만드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왜 그만두신 거죠? 더이상 계속할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미학적으로도, 자본적으로도. 선생님, 여전히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할 수 있죠. 그냥 써야죠. 근데 무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미래가 너무 막막해져요. 제가 해답을 알아요. 뭔데요? 제 유튜브를 구독하세요. 채널에 소설 쓰는 법이 올라가고 있어요. 아, 네. 소설가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좋아요’와 알림 설정까지 누르자 그는 이제 됐다며 진지하게 말해주었다. 민성씨, 제가 인터뷰 때 한 말 기억나요? 왜 쓰는지 작가님도 모르겠다고요? 아뇨. 문학에 대한 이해는 그 문학을 쓰는 삶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요. 그게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그걸 기억해요. 다시 떠올려봐요. 결국 문학도 예술도 삶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법이에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민성씨가 비로소 본인의 삶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몰라요. 제 미래가 노답이란 뜻인가요? 제 미래도요.

3.

잡지든, 책이든, 영화든 많이 보면 삶에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엔 정반대다. 그것에 매료되고 빠질수록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믿고 있던 미래는 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상이라도 무엇이든 붙잡을 것이 있고 진실이라도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서점에 앉아 매일 몇권의 잡지와 책이 팔리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얼마나 형편없는 관객수를 동원했는지를 볼 때마다 슬퍼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돼버린 것이기 때문에. 사실 나는 문학도, 예술도, 잡지도, 영화도 이 모든 행위가 덧없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 역시 그렇다. 우주의 시간으로 생각하면 찰나도 되지 않는 존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그런데도 수많은 예술가가 그런 허무와 무의미를 모르는 채로 혹은 모르는 척하며 쓰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말이 정해져 있어도, 지금, 이 행위가 한낱 자위행위로 결정될지라도 그와 상관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중요한 것은 완성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완이 중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완성이나 미완 따위가 아니다. 그것으로 향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앞으로 이 도정에 단어들이 얼마만큼 사라지고 생길지 모르겠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것은 구원(redemption)일까? 아니면 구원(salvation)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