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송경원 편집장] ‘파묘’와 ‘듄: 파트2’, 사랑스러운 호들갑
송경원 2024-02-23

프랭크 허버트 작가의 소설 <듄>은 함부로 믿지 않는 자를 어여삐 여기는 이야기다. 그래서 좋아한다. 표면적으론 분명 닳고 닳은 메시아 서사인데, 이제껏 영상화된 결과물들이 사막행성 아라키스에서의 투쟁기와 영웅 탄생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더욱 그쪽으로 소비되는 게 아닌가 싶다. 몰락한 명문가의 정당한 계승자가 변방에서 힘을 키워 돌아오는 복수담은 언제나 잘 먹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 오래된 상상력은 사실 통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신화적 서사보다는 정해진 운명 속에서 번민하는 연약한 인간의 초상을 응시한다. 메시아의 성경보다는 <맥베스>나 <리어왕>에 가깝다.

대개의 SF가 그렇듯 설정과 무대가 우주 단위일 뿐 근간의 질문은 간단하다. 최선의 운명과 최악의 자유의지 사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듄>의 무대는 미래 우주지만 속살은 종교와 신비주의로 포장된 중세 암흑시대로 채워져 있다. 과학이란 이름의 새로운 종교를 믿는 집단 베네 게세리트는 메시아를 막연히 기다리는 대신 우생학과 신비주의를 기반으로 초월자 ‘퀴사츠 해더락’을 (생물학적 교배를 통해) 디자인하는 데 매달린다. 수많은 씨앗 중에 통제를 벗어난 가능성 하나가 먼저 싹을 틔웠으니, 그가 바로 폴 아트레이데스다. 인류를 이끌 운명을 타고난 퀴사츠 해더락은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 중에 황금의 길을 예지할 수 있다.

딜레마는 여기서부터다. 결과적으로 인류 전체를 위하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과정에 수많은 희생이 따른다면 그 길을 갈 수 있는가. (역사가 증명하듯 수많은 독재자들이 자신의 길을 확신했다.) 심지어 폴은 진짜 퀴사츠 해더락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본 황금의 길이 진정 최선이라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때문에 폴은 쉼 없이 고뇌하며 흔들린다. 흥미로운 건 흔들리는 동안의 그가 더 미덥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각성하여 영웅의 길을 걸을수록 그의 눈도 함께 멀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듄>은 맹목과 추락에 관한 서사이기도 하다. 프랭크 허버트는 합리적 추론과 과학적 낙관 대신 불신을 기반으로 인간의 본성을 애정한다. 인간은 흔들리기에 어여쁘다.

나는 불신자다. 모두가 입 모아 걸작이라 칭송하는 영화, 이게 맞다고 확신을 주는 영화를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딱히 궁금하지 않다. 차라리 비판받으면 대신 방어해주고 싶은, 갑론을박의 영화에 끌린다. 각자의 애정을 바탕으로 충돌하는 순간은 마치 폭죽놀이처럼 신난다. 오랜만에 영화가 끝나고 나서 수다를 떨고 싶은 영화들이 나왔다. <파묘>의 도발이 여러분을 달구고 <듄: 파트2>의 성취가 우리를 경탄시킬 것이다. 확신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두 영화 모두 사람들마다 입장이 갈릴 작품이라는 사실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영화가 좋았다면 즐거운 흥분과 고백을 이어가길 희망한다. 누군가의 고평가가 납득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도 좋겠다. 시사가 끝난 뒤 전에 없이 호들갑을 떠는 기자들을 보며 문득 이런 순간들을 위해 영화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이 사랑스런 호들갑이 널리 퍼지고 오래 이어지길.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