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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예더봉
2002-10-18

편집장이 독자에게

공원 잔디밭에서 젊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우리 아줌마들이 팥주머니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다. 기다란 사각형 안에서 서른명의 사람들이 팥주머니를 피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나라별로 부스도 만들었다. 공원에 놀러나왔다가 만나는 구경거리다. 그 부스를 돌며 하얀 손수건에 아시아 각 나라 글씨로 사인도 받는다. 준비해둔 그 나라 음식들도 한점씩 맛본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운동회날이다. 중앙의 무대에선 나무판과 스티로폼으로 네모난 방을 하나 후닥닥 만들어 놓는다. 일일 감옥 체험프로그램이라도 하려나. 구경꾼이 구경을 놓칠 리 없다. 영화상영을 합니다. 집을 짓던 엉터리 목수가 잡는다. 무슨 영화? <데모크라시 예더봉>일까, 한국에서도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였으니까 이런 데서 어울리긴 하겠네. 영화를 튼다는 방송이 나가자 아이들 대여섯이 신이 나서 달려든다. 그런 게 아니구요, 외국인 노동자들이 직접 찍은 겁니다.

엔지 필름을 잘라내지도 않은, 찍힌 순서대로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는 초보 중에도 진짜 초보자의 솜씨다. 툰툰라 ‘감독’이 세상에서 처음 만들어본 영화들. MBC의 8·15 특집프로그램의 화면이 흔들거리며 건들거리며 스크린을 채우고, 감독 겸 주인공 툰툰라의 해설이 시작된다. 텔레비전 화면을 클로즈업하려는 감독의 의도와 달리 카메라가 옆에 선 자신을 비키지 못하자 툰툰라는 하는 수 없이 화면 오른쪽으로 자꾸자꾸 도망을 간다. 그러면서 할말은 한다. 오늘은 한국의 독립기념일입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특집방송들을 내보냅니다. 그런데 미얀마 방송은 이런 프로그램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미얀마에서도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다뤘으면 좋겠습니다. (치졸한) 극적 효과를 위해 감독의 국적을 지금에야 밝혔다.

정적인 아웅산 수지의 부친의 독립운동행적을 들추지 않을 수 없기에, 미얀마 군사정부는 그런 특집극을 금했을 테지. 강제추방에 항의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행진을 보여주다가도 툰툰라는 옆길로 샌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데모를 합니다. 미얀마에서도 군사독재가 끝나면….

에이, 재미없다. 아이들은 툴툴거리며 부스럭거리며 자리를 뜨는데, 나이든 구경꾼은 코끝이 찡해진다. ‘카메라 예더봉(봉기)’을 준비하는 이 <데모크라시 예더봉>의 주인공들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