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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2003-04-19

지난해 지리산에 풀어놓은 반달곰 반순이가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담은 TV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청승맞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내 주변의 몇몇 사람들도 그랬다고 했다.

지난주에 장국영이 죽었다. 홍콩에 다른 일로 취재갔다가 서울과의 전화로 그 소식을 알게 된 김현정은 전화 너머로 계속 훌쩍거렸다. 돌아와서 그에 대한 추모기사를 쓰면서 또 울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를 가슴에 품고 있던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울었을 것이다. 내 가슴에도 스산한 바람이 스쳐갔지만, 그들과 함께 울지 않았다.

시골의 한 고등학교 여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전자메일이 아닌,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 라고 겉봉에 쓰인, 그리고 빼곡한 글씨로 채워진 4장의 편지지가 담긴, 우리가 알던 그 편지였다. 특강을 해달라는 간절한 사연을 담은 그 편지를 옆자리에 앉은 김소희에게 보여주자, 그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를 울게 했는지 막연한 짐작만 하며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쟁을 증오한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온 나는, 속절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 그리고 팔이 잘려나간 아이의 비명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렇게라도 전쟁이 끝난 걸 다행이라고 말하는 내 마음의 야비한 소리를 들었다. 나의 분노와 슬픔은 그 야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야비함은 미래의 평온을 희망하고 있었다.

내 슬픔은 뒤죽박죽이며 정당하지 않다. 다만 그것은 늘 과거로부터 온다는 걸 알겠다. 슬플 때, 내 마음은 어떤 과거와 대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비로소 생의 감각이 손을 내민다. 미래는 대개 야비함과 두려움을 예비한다. 마감을 하고 있다가 단편 <스케이트>를 만든 조은령 감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그 재능의 일부만 펼치고 간 그에게, 그리고 이 땅에 던져졌다 막 육신의 삶을 다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직 살아 있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쩐 일인지 지난해를 거치며 이제 오래도록 잠자고 있어도 좋을 거라고 믿었던 구절을 꺼내들어 바치고 싶다. 소설가 김영현이 <박하사탕>을 말하면서 인용한, 북베트남 인민군 소년병 출신 바오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 중의 한 구절이다.

“내 과거의 깊은 심연에서 끝없이 불어오는 사랑과 자유의 슬픈 바람. 내 인생을 꿰뚫고 이 거리로, 이 동네로, 도시로 끝없이 불어오는… 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추억의 힘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