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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정우성이 시위대의 맨앞에 서서 외친다. 무슨 소리인지 들리진 않으나, 시위대는 반전 평화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곧이어 정우성은 두세명의 전경에게 들려간다. 그런데 정우성은 팔다리가 들려서도 웃는다. 웃으며 무언가를 계속 외친다. 외치면서 웃는다.

최근 TV에 자주 나오는 한 의류 광고다. 한 후배는 이 광고가 기분 나쁘다고 했다. 그가 기분 나쁘다고 느낀 이유는 잘 이해된다. 지지난해라면 나도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이상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그 광고가 기분 나쁘다면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고결한 이상주의를 물건파는 데 써먹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정우성이 속한 쇼 비즈니스 세상은 속되고 정치적 이상주의는 성스럽다는 암묵적 판단 때문이다.

첫째 이유라면 나도 아직 벗어나지 못한다. <아침이슬>이 햄버거 광고에 쓰일 때 내 마음은 그것에 격렬히 저항한다. 그 곡의 사용을 허락했을 저작권자에 대한 원망까지 밀려온다. 두 번째 이유라면, 지난해를 거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정우성이 그 반전시위의 현장에서 소리지르는 게 어울린다고 이제 느껴진다.

그건 정우성이란 사람을 내가 특별히 잘 알아서가 당연히 아니다. 실제로 세칭 딴따라들이 촛불시위, 반전시위에 참여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70, 80년대에 혁명을 부르짖던 사람들 중 다수, 특히 특정 정당에 들어간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딴따라들 그리고 영화보고 게임하길 즐기는 ‘속된’ 사람들 중의 다수는 참여했다.

더 중요한 건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참여의 방식이다. 한결같이 구호가 쓰인 머리띠를 두르고 사생결단내겠다는 근엄한 표정으로 참여하는 게 아니라, 집에 가다가 혹은 볼일보러가다가 한번 참여하고 곧바로 가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 방식의 참여가 월드컵 때 시작됐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가벼운 일이다. 자신의 생을 건 결단이 아니라(그런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짬을 내 잠시 동안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자를 배려하는 일이다. 그것은 엄숙한 정치적 결단보다 가볍지만, 그 가벼운 배려의 시간 동안 그들은 전적으로 자발적이다. 그래서 정우성은 웃을 수 있고, 웃어서 좋다.

최근 신문들에서, 지난해 이맘때 우리는 하나였는데 오늘 우리는 왜 이렇게 갈라져서 싸우나, 혹은 그때의 함성을 오늘의 위기극복의 에너지로 따위의 제목이 종종 눈에 띤다.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월드컵의 열기를 정치적 동원의 맥락으로 끌어들이려는 모든 말들은 헛소리다. 하나 되자는 구호는 모두 거짓이다. 인간은 단 한 사람의 타인과도 하나가 될 수 없다.

이해관계가 다를 때, 사람들은 싸울 수밖에 없다. 그 불가피한 싸움 앞에서, 지난해의 그리고 올해 초의 그 가벼운 참여와 연대는 사소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가벼운 참여자들은 대개 개인주의자들이다. 개인주의자에게 중요한 건 게임의 규칙이다. 스포츠와 게임의 매력은 그것이 극히 명료하고 공정한 규칙 아래 이뤄진다는 점이다. 절대 하나가 될 순 없지만 공정한 규칙 아래 그들은 참여하며, 공정한 규칙이 짓밟힐 때, 그들은 분노한다.

그들은 개인주의자이지만, 그것은 열린 개인주의다. 그 열려 있음이 어떤 정치적 이념보다 시원하다. 정우성의 웃음은 그를 바라보는 내게 열려 있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그 광고는 상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