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두 영화

시사회를 이런저런 일로 놓쳤다가 결국 비디오로 보게 되는 영화들이 종종 생긴다. <클래식>도 그런 영화 중의 하나였다. 이 영화는 비평적으로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영화를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클래식>은 신파다. 신파의 공식대로 절대 사랑이 절대 실패한다. 절대 사랑은 그 자체로는 완전하므로 그를 부정하는 외부의 힘이 절대적이어야 실패한다. 그래야 신파가 완성된다. 사랑도 절대적이고 실패를 초래하는 외부의 힘도 절대적이라야 한다면, 이야기는 과장과 비약을 피할 수 없다.

<클래식>도 그렇다. 그러나 심금을 울렸다. 처음엔 영화의 시대와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향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이 있었을 것이다. 부잣집 아들이지만 정신적 저항력이 전혀 없는 꺽다리 친구는 자꾸 실신하며 나중엔 목을 맨다. 유년의 낙원에서 추방된 뒤로는 누구도 풍요롭지 않았고, 주위에선 무언가 자꾸만 사라져갔다. 새 것이 사라진 것의 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이상향의 이미지는 늘 과거에 속해 있다. 그 꺽다리 친구의 반복되는 실신이 이상하게도 아득한 상실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심금을 울린 건 또한 신파였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우리의 소망은 단순했다. 좋아하는 한 여인 혹은 한 남자를 만나 그를 바라보고 웃으며 평생을 사는 것이다. 그 소망의 좌절은 대개 사랑이라고 불리는 감정의 유한함에서 온다는 점에서 <클래식>은 거짓말이지만 한때 우리는 그 소망을 순진하게 믿었고 그 믿음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충만했다. 충만한 소망의 시대는 봄날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경험과 이성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충만의 기억이 그 소망의 상태를 여전히 그리고 헛되이 소망케 한다. 내게 <클래식>은 그 기억을 자극해 헛된 소망을 더 부추겼고, 그것에 저항하지 못했다.

지난주에 개봉한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의미있는 영화다.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도발의 모티브가 아니라 이처럼 생활의 일부로 그린 충무로 영화를 이전에 보지 못했다. 절대 사랑의 언어는 쓰레기라는 걸 여주인공은 잘 알고 있으며 그것과 싸우기는커녕 아예 신경 끄고 산다. 그건 멋진 태도다. 주변의 여자 후배들도 대개 이 영화가 흥미롭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알몸들과 그들의 생생한 마찰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했다. 경험과 이성의 경고를 반복해서 듣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 말은 맞지만,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아마 차라리 헛된 소망을 자극하는 거짓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헛된 소망을 버릴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신파는 그 외양을 세련되게 바꾸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 같다. 박수 칠 일은 아니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