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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과 소목
2003-08-25

하늘에서 가을 소리가 들린다. 방사형으로 화사하게 꽂히는 햇살, 실로폰 채로 치면 또로롱 울릴 것 같은 투명한 공기, 부지런히 줄을 뜯는 가야금 연주자의 손가락처럼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이 가을 소나타의 서주를 연주하는 계절이다.

이번주 <씨네21>은 가을영화의 행렬을 예고하고 있다. 짧지만 미려한 소개글들에 마음이 살짝 설레더니 갑자기 코끝에서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얻어 입었던 추석빔의 새옷 냄새가 맡아지고, 한가위 특유의 넘치는 듯한 풍성함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하는 대하소설 <토지>가 이내 떠올랐다.

전환기의 청춘이 흔히 그렇듯이 정신적인 홍역을 호되게 앓던 시절,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방콕’하며 여러 대하소설을 끼고 살았더랬다(아, 그 풍성한 시절을 왜 비참한 슬럼프라고만 생각했던 것일까?). 그중에서 <토지>는 내리닫이로 두 바퀴 반을 읽었는데(세 번째 바퀴가 채워지기 전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거기 나오는 여러 인물 유형과 직업군 가운데 목수가 두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명은 윤보라는 이름의 늙수그레한 대목(大木)으로서 커다란 연장과 나무를 가지고 퉁탕퉁탕 집을 짓는 기술자인데 세월이 하수상하니 그 화를 못이겨했다. 또 한 사람은 조병수라는 소목(小木)이다. 그의 아버지는 시절의 악덕을 앞장서 실행하는 사람으로 주인공 서희네 가문을 요절내더니 곱사등이 아들 병수를 서희와 혼인시키려 한다. 마음이 고운 병수는 이도저도 못하다가 집을 떠나 소목장이의 길을 걷는다. 나는 지금도 통영에 가면 심지 바르고 솜씨 좋은 조병수가 만들었을 아름다운 자개장이 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흔히 복잡한 구조를 가진 조직체를 건축물에 비유한다. 그래서 ‘건축학적 구성’이라고 하면 규모가 크고 정교하며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칭찬으로 알아듣게 된다. 이 말은 하나의 예술작품은 물론이고 어떤 조직의 시스템,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유무형의 생산물, 혹은 사회 전체에 적용되기도 한다.

사물의 구조 자체를 창안하거나 혁신하는 대목, 그것을 세공하고 채워나가는 소목. 이 둘은 각자의 시야나 기능이 다르지만 반드시 상호보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지금 한국은 정치나 문화를 비롯한 삶의 현장 곳곳에서, 비전과 솜씨를 갖춘 대목과 소목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