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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비
문석 2003-09-26

비와 태풍으로 한 계절이 지새고 새로운 계절도 젖어서 오고 있다. 살면서 물 무서운 꼴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는지라 비 마니아를 자처해왔지만 지금은 말문이 막힌다. 물 피해를 연달아 당하고 나니 살맛이 없다며, TV카메라 앞에서 울지도 않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요새 내리는 비는 단순히 자연의 변덕이나 위력 탓으로 돌리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아마도 환경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런 혐의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우리가 환경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중 하나가 환경문제를 윤리의 문제 혹은 가족주의의 틀로 바꾸는 것이다. 저런 난리를 겪었으니 저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냐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기부금을 거두는 방식이 단적인 예다. 이 땅의 착한 사람들은 오늘도 열심히 ARS를 눌러 작은 돈을 기부하며, 피해를 당한 가족들이 따뜻한 밥 한끼라도 드시게 되기를 기원하고 자신이 지금 누리는 편안함에 대해 미안함 섞인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방식이 근본적인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더 아찔한 것은 그렇다면 무엇이 답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이다. <현대사회는 생태학적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가>라는 책 제목이 망연한 마음속에 와서 꽂힌다.

저자인 니클라스 루만은 현대사회의 중요한 기능 체계들, 예컨대 정치, 경제, 교육, 법률, 사회운동 등이 생태학적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답변하는데, 그 설명이라는 것이 매우 비관적인 가운데 희망을 찾으려는 안간힘처럼 들린다.

이제 우리는 생태학 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재구성해야 할 절실한 필요성에 직면해 있는 것 같다. 그 출발점은 환경이라는 단어 자체를 재검토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19세기 들어 새로 등장한 환경(environment)이라는 낱말은 무엇을 둘러싸고 있다는 어원을 가졌다는데, 이는 자연을 인간의 삶과 사회 체계의 바깥에 있는 무엇, 그러니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타자로 만들어버리는 발상을 깔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영상문화는 생태학적 커뮤니케이션에 기여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우연하게도 최근에 우리는 ‘환경’문제를 전면화한 작품을 만난 적이 있다. 바로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다. 개봉을 앞둔 <내츄럴시티> 역시 미래사회의 풍경을 환경에 관한 디스토피아적 비전과 연관시키고 있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실천을 유도하진 않지만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는 특수성이 있다. 니클라스 루만이 애써 가져보려 했던 희망을, 나도 영상문화에 대해서 가져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