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오인

착각이나 오해가 가끔 뜻밖의 진입로 구실을 하기도 한다. 일본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고 난 뒤 여주인공이 더 멋있게 나온다는 원작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기억과 달리 내가 갖고 있는 책은 <열정>이라는, 제목이 얼추 비슷한 헝가리 소설이었다.

대문호다운 필치로 묘사된 이 특이한 정념의 세계를 ‘헝가리적’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작가인 산도르 마라이는 물론이고 헝가리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 헝가리 사람들도 한국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을 들을 때 다시 비슷한 기분이 떠올랐다. 지젝의 방한과 연이은 강연회는 한국의 진보적 학문 공동체를 술렁이게 만들었는데, 놀랄 만한 지적 섭렵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안 담론의 동력을 일구고 있는 ‘유럽 인문학의 천재’마저도 어떤 맥락에서는 주변인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인 그는 미국에서 있었던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내가 히치콕에 관해 강연하자 한 미국 기자가 물었다. ‘당신네 나라에서 지금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당신은 여기서 히치콕 이야기나 하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럴수록 나는 히치콕에 대해 말해야 하고 당신네 미국인들은 슬로베니아에 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이미 전세계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사실상 통합된, 이른바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적어도 내 머리 속에는 헝가리나 슬로베니아가 없다. 혹은 지젝이 “인종차별주의적 시선”이라고 부른 그 미국 기자의 편견보다 더 나은 생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

없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이라크도, 송두율도 실은 없다. 이라크나 송두율 대신 그들에 대해 말하는 미국과 남북한 정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더 우스운 것은 그렇게 말해지는 내용이 이기적인 위선이거나 매우 복잡한 진실의 일부일지 모른다는 증거들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보던 대로만 보고 말하던 대로만 말하고 행하던 대로만 행하려 하는 나를, 당신을, 우리를 보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삶을 설계하고 지탱해온 각종 체계들이 과연 아직도 유효한가? 잘못 기억한 소설책에 유도된 상념이 여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