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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 이야기 두 번째

내 생각에 조선시대 최고의 왕따는 허균이 아닐까 싶다.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것밖에 모르던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여행 중에 마주친 시비(詩碑)를 통해 그가 교산(蛟山), 그러니까 이무기 교자가 들어간 호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역적으로 처형되었으며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복권되지 않은 유일한 지식인·정치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그에 대한 관심이 몹시 치솟았다. 스스로 용이 못 된 이무기를 자처했고, 왕조 내내 용서할 수 없었던 대역죄인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일까.

허균은 15∼16세기에 걸쳐 선조와 광해군대를 살았고 고려시대 이래 대대로 문장가를 배출한 집안의 후예였다. 아버지와 두 형, 그리고 누이 난설헌까지 아울러 오문장가라고 불렸으며 임진왜란 전후의 어려운 국제정세 속에서 대중국 외교사절단에 단골로 끼었다. 그때마다 책을 수천권씩 사들였다. 고도의 중앙집권적 지식국가에서 정치적 출세의 핵심 요소를 두루 갖춘 허균은, 그러나 소소한 관직에 임용되었다 파직되기를 반복했고 사대부 사회에서의 평판 역시 ‘괴물’로 낙착되었다.

그는 서얼이나 중하층과 깊이 교유하고 불교나 양명학 좌파, 심지어 천주교 등 이단이나 혁신 사상에 천착하는가 하면 기생과 평생토록 우정을 나누었다. 가문의 구성원리를 국가의 구성원리로 끌어올렸고 선명한 사상적 기치를 내걸었던 조선이었으므로 허균의 행적은 계급, 이데올로기, 성차 등에 걸쳐 당대 사회의 본질적 한계선을 건드린 셈이었다. 허균이 조선시대가 배출한 여타의 비판적 사상가들과 다른 점은 체제의 한계를 천착했을 뿐만 아니라 몸소 이쪽 저쪽으로 휘젓고 다녔다는 것이다. 광해군 말기의 정치적 격동기에는 왕과 집권층의 코밑에 들어가 혁명을 도모하다 판결문도 없이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다.

나는 조선왕조가 수백년에 걸쳐서 소화불량일 수밖에 없었던 어떤 한 존재를 가졌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낀다. 지금이야 그 체제의 한계가 뚜렷하게 보이지만, 시대의 한복판에서 튀어나온 허균은 인간의 보편이성이라는 것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문득 김기덕 감독을 생각한다. 그는 한국 영화계에서 단 한번도 재현의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는 계층에서 솟아올라, 단 한번도 그런 방식으로 재현돼본 적이 없는 대상들을 고집스럽게 다룬다. 김기덕 감독으로 인하여 나는 기존의 영화들이 얼마나 유사한 세계에 속해 있었는지를 인식한다. 그의 신작 <사마리아>가 가치있다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변함없이 이질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허균은 자신에 대한 끝없는 탄핵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지켜라. 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체제의 모든 한계를 꿰뚫어 넘나들면서, 날더러 너는 네 법이나 지켜라고 일갈할 수 있는 ‘이무기’ 혹은 ‘괴물’을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