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차이의 아름다움

교과서에 실린 텍스트들의 운명은 불행하다. 어떤 시도, 에세이도 그 사유의 구조와 언어의 향취를 우아하게 자랑하는 대신 입시용 도마 위에 얹혀 산산이 찢기고 분류당한다. 고등학교 시절, 어떤 시의 한 구절에 밑줄을 죽 긋고 그 의미를 묻는 시험문제가 있었는데, 나는 참고서가 가르쳐준 ‘보릿고개의 아픔’이 아닌 ‘봄날의 서정’이라는 ‘틀린’ 답을 기어이 적어냈다. 발표된 정답은 물론 보릿고개쪽이었다.

그 유혈 낭자한 해부의 시간을 뚫고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언어들이 몇 가지 있는데, 청자 연적 이야기가 그중의 하나다. 여섯개의 연꽃 잎으로 장식된 자그마한 도자기에서 이파리 하나가 살짝 비뚤어져 있더라며,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을 감행한 고려 도공의 미의식을 말한 에세이였다.

이런 삐딱한 미감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특정 영화 혹은 감독에 대한 평이 천편일률일 때 지루하고 불만스럽다. 내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모두 한목소리로 말하면 문득 의심스러워지며 딴청을 부리고 싶어진다. 한목소리는 어떤 억압의 결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억압이 외부의 힘이든 내면화된 권위이든 획일화된 취향이든.

이번주 <씨네21>은 그래서 즐거웠다. 페미니즘 비평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해온 그간의 비평 릴레이에서 홍상수도 나쁜 남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평하는 주류 목소리는 “여전히, 전폭적으로 홍상수의 시선과 언어를 지지”(김봉석, 20자평)하며 별넷을 주는 쪽인 듯하다. 이 와중에 영화평론가 김경욱 선생은 페미니스트들이 만약 김기덕의 영화에 대해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불쾌하다고 느꼈다면, 홍상수에 대해서는 왜 같은 기준으로 말하지 않는가를 질문한다. 여섯개의 연잎 중에 꼬부라진 하나! 그건 홍상수 감독도, 비평계도, 저널도 함께 흥미로워지는 일이다. 지난호에 실린 듀나의 <어린 신부> 비판에 이어 어린 관객의 판타지를 옹호하는 황진미 평론가의 글이 실리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즐겁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특집 기사였다. 애초에 <씨네21> 창간 9주년을 기념하는 일환으로 시네필들의 존재가 한국 영화계를 어떻게 바꾸어냈는지 문화사적으로 짚어보자는 기획이었으나 박은영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흥미로운 국면을 끌어냈다. 하나로 묶어내기엔 너무나 개인적이고 다양한 3세대 영화광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앞세대 영화광들이 영화계의 전 영역에서 위풍당당한 영향력과 생산력을 보여주는 지금, 선배 세대들의 잣대를 “권위적”이라고 일축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미래의 한국영화를 전망해보자는 박은영 기자의 제안은 솔깃하게 들린다. 이번주 외신기자 클럽에서 프랑스인 필자는 한국의 ‘누벨바그’가 아버지를 “살해”하며 시작되었던 프랑스와는 다른 경로를 밟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한국 영화계는 지난 십여년에 걸쳐 대부분의 아버지를 사실상 ‘수장’시켰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3세대 영화광들의 물결이 미래의 십년을 어떻게 만들어갈지,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