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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원

한 군인에게서 편지가 왔다. 연두색 봉투가 하도 얌전하여 나도 얌전하게 가위로 봉투를 오리는데 천원짜리 지폐 몇장이 먼저 툭 떨어졌다. 의아해하며 내용물을 펼쳐보니 <어린 신부> 비평문 두장, 따로 자신의 심경을 적은 편지 한장이 들어 있고, 본인의 리뷰가 혹시 <씨네21>에 실리게 되면 한권 보내달라는 메모가 말미에 붙어 있었다. 동봉된 돈의 액수는 3천원. <씨네21> 한권값이다.

그 군인은 제대하면 영화 공부 열심히 해서 5년 안에 <씨네21>의 표지에 등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외출하는 동료들에게 <씨네21>을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현역 군인이자 예비 영화인인 그에게는 중요한 일인 모양이다. 자신의 삶이 유예되어 있다고 느끼며 피안을 건너다보는 젊은이에게 강 건너에서 반짝이는 환상은 얼마나 눈부시고 간절할 것인가.

참으로 오랜만에 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중이다. <씨네21>은 독자의 개성과 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 느낌과 기능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렇게 가슴 죄는 애정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몇 십명의 스탭들이 매번 진이 빠질 정도로 자신을 던져넣는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작업의 결과물이 매주 3천원을 타고 날아가 누군가의 가슴에 따뜻하게 내려앉는다는 거다. 지친 얼굴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동안 <씨네21>이 영화잡지 시장에서 시도되는 극단적인 생존 전략과 한국 경제의 침체를 별로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저 간절한 열망으로 지원받고 초췌한 아름다움으로 내응하는 관계 덕분이었나 보다. 우리의 길이 풍성하고 아름답도록 지켜주고 계시는 독자들께 감사드리고, 이 사실을 깨닫게 해준 3천원의 주인공께도 감사드린다. (아! 그래도 힘듭니다. <킬 빌 Vol.2>를 보고 “흥분된다”고 표현하시는 분 때문에 질투심 느꼈답니다. 저는 고작 “훌륭하네, 잘 만들었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직업병이 있더라구요. <킬 빌 Vol.2>, 훌륭하던데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