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칸 쇼크

올해의 칸영화제는 여느 해, 어떤 영화제보다 대중적인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킨 듯하다. 그 중심에는 막판에 경쟁부문으로 차를 갈아타고 개선 행진까지 해버린 <올드보이>가 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칸이 우리에게 이중의 쇼크를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고 있다는 점이다. 칸영화제-프랑스 평단-프랑스영화-프랑스의 교육과 이론은 오랫동안 효율적인 결합관계를 이루면서 칸으로 하여금 세계 영화미학의 선도자, 발견자, 중심지라는 이미지를 갖게 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런데 올해의 칸은 스스로 그와 같은 이미지에 일정 정도 균열을 일으켰다.

<씨네21> 취재진의 노련하고 성실한 리포트는 칸의 정체성과 영향력이 형성된 기원과 메커니즘,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짐작하게 만들고, 언제부턴가 칸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 시작했으며 칸의 집행부가 생각보다 허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심지어 일부 영화인들은 “칸은 늘 뒷북을 쳐왔다. 미래의 거장을 감식하는 데 느리고, 아시아 영화미학에 대해 아둔하며, 신예들의 베스트를 뽑지 못했다”거나 “프랑스 평단은 누벨바그 시절의 그 평단이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칸의 권위는 그렇게 간단하게 도전될 만한 것이 아닐 뿐더러, 칸에 드리워져 있던 신비의 휘장을 이런 식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정당한지 혹은 바람직한지는 논란의 대상으로 남는다. 특히 시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마지막 보루라고 불리는 프랑스 평단의 존재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가 칸에 안이하게, 누군가는 때로 맹목적으로 의존해왔을 수도 있다. 나는 일부 영화인들의 칸을 향한 맹렬한 의지와 신뢰를 접할 때 이것이 혹시 서구를 중심으로 놓고 스스로를 변방으로 위치지운 채 그 텅 빈 중심을 향해 퀭한 시선을 던져온, 골수에 깃든 우리의 근대병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진 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칸의 탈신화화를 지지한다.

<올드보이>의 선정과 수상은 또 하나의 충격 요인이다. 평론가들이 대체로 당혹해하거나 ‘타란티노 궁합’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일반 관객은 “내가 원래부터 <올드보이>를 무지 좋게 봤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간단한 에피소드지만, <올드보이> ‘사건’이 영화제-평단-작가주의 진영보다는 시장-관객-상업적 장르영화 진영을 더 기쁘게 만들고 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평단의 보루였던 칸이 평단을 배신한 셈인가? 어쨌거나 이분법이란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기에 역부족이라는 점에서 나는 두 진영의 경계가 무너지는 조짐을 즐겁게 관찰하는 중이다.

다만 <올드보이> 사건이 역으로 반대쪽 편향을 정당화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칸이 남긴 쇼크는 외부의 시선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치고 우리 자신의 시선으로 한국의 영화, 아시아영화를 질문하는 방법을 새롭게 익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선한 자극 정도로 받아들이면 족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