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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 최강

최근에 익힌 말 가운데 기특하게 쓸모 많은 것이 ‘동급 최강’이다. 급의 차이 즉 범주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평가는 각각의 범주 내부에서 내리겠다는 화법이다. 이것을 영화에 적용하면 특정 부류 자체를 옹호하거나 배척하는 대신 그 부류들 안에서 잘 만들어진 혹은 소홀한 영화들을 분별하고 평가하는 태도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문화 다양성이란 동급 최강이 많다는 뜻일 터.

나는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취향이 선명한 편인데, 내가 좋아하는 범주 안에서 어지간히 잘 만들어진 영화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동급 최강이 주는 기쁨의 총량이 얼추 비슷하지 싶다. 물론 좋아하는 부류의 동급 최강을 만나면 몽롱하게 취한 기분이 2주일쯤 간다. 취향에 따른 관대함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직업적인 이유로 시사회를 다니다 보면 참 못 만들었다 싶은 영화에도 어쩌다 걸리게 되는데, 그럴 때는 내 얼굴 아는 사람 없다면 10분 만에 일어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만든 이에 대한 예의와 관련자들의 체면을 덜 의식하게 되는 외국의 영화제에서는 10여분 정도면 영화를 계속 볼 것인지 다른 영화를 찾아 떠날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그들은 아마도 되도록 많은 영화를 보아야만 하는 직업인이며 표를 돈 주고 사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10분 동안 파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영화의 구조와 리듬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결국 형식이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인어공주> 이야기를 한다는 게 서론이 길어졌다. 이 영화는 동급 최강이다. 영화의 리듬과 스토리텔링이 모두 어엿한데, 무엇보다 이 영화를 동급 최강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딸의 눈으로 발견하는 부모, 특히 어머니라는 새로운 시선이다. 아, 이것도 여전히 서론이다.

실은 딸인 나는, 젊은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눈 사랑과 선택, 그들이 통과한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나, 시간이 바꿔놓은 부모의 모습을 생각하라는 <인어공주>의 잔잔하고 다정한 제안 앞에서 가슴이 무너질까봐 겁내며 영화를 봤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