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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다는 것은

2002년 베를린이었다. 그해 영화제에 온 유럽 사람들이 <블러디 선데이>에 대해서 보이는 반응은 내 감각을 넘어서는 데가 있었다. 이번주 김현정 기자의 글이 알려주듯이, 이 영화는 동시대 유럽인들의 기억 속 어딘가를 건드려 통증을 유발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의 내게 <블러디 선데이>의 스타일과 내용은 기억이 아니라 현실에 가까웠다. 그것을 정면으로 대하자니 어질어질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기억은 안전거리를 갖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충무로는 가까운 과거에 일어났던 실화들을 열심히 뒤쫓고 있다. 정한석 기자는 이를 두고 한국 근대사에 뚫려 있는 블랙홀로 빠져들어간다는 표현을 썼다.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들여다보았던 땅밑의 검은 구멍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거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왜 들여다볼까?

과거를 캐는 것은 현재가 마뜩찮거나 고통스럽다는 뜻일 터이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레 개인의 기억을, 집단의 역사를 뒤적이게 된다. 그러다가 마주치게 되는 순간들은 때로 예기치 못한 영감을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에피소드 혹은 난해하거나 아이러니로 가득 찬 어떤 순간들이 상징적이고 맥락화된 의미를 띠고 떠오른다. 그것들이 현재의 패턴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해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 한국의 대중영화가 하려는 일이 바로 이 작업이 아닌가 한다. 뒤를 돌아보려는 포즈는 그동안 정신없이 달리고 내몰리며 만들고 통과해온 이 땅의 모더니티의 얼굴을 그려보려는 욕망과 짝을 이룬다. 그것은 또한 치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옛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것은 결국 원한에 사로잡힌 것을 위로하고, 안쓰러운 것은 어루만지고, 구부러진 데는 펴고, 넘치는 것은 아이러니의 미소로 덜어주려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며 치유하려는 욕망, 이것은 충무로의 욕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