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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이야기

“서울은 풋내기가 그린 유화다. 급하게 위로 덧칠하고 또 덧칠하고. 얼마나 급하게 그렸는지 밑색이 고스란히 올라오기도 하고 군데군데 미처 칠하지 못해 생뚱맞은 색들이 보이기도 한다.” 현재 온라인 전시 중인 <한 도시 이야기>(http://handosi.cine21.co.kr)에서 누군가 쓴 표현이다. 전시 중인 사진을 보노라면 참 맞는 말이다 싶다. 여기서 핵심은 ‘급하다’는 데 있다. 빨리 짓고 빨리 부수고, 빨리 뚫고 빨리 메운다. 내 몸이 서울이라면 너무 많은 성형수술에 괴물처럼 변했을 것이다. 잘못 주입한 실리콘으로 살과 근육이 뒤틀리고 뭉개진 흉한 몰골이 연상된다. 변화의 속도 면에서 서울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경쟁력 있는 곳이다.

지금도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한강의 기적, 단기간의 고속성장’ 뭐 이런 것이 대한민국의 자랑이라고 배웠다. 춥고 배고팠던 부모 세대 얘기는 이런 말을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내 어머니가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감격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지만 당신은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입주한 듯 기뻐하셨다. 아파트가 중산층에 진입한 증거로 인식되는 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파트 CF는 이동통신 CF 못지않게 잘 나가는 상품이다. 하긴 서울의 땅덩어리로 1천만 인구를 포용하자면 아파트 말고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아파트와 더불어 서울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한강이다. 가끔 외국에 갔다 돌아올 때 한강을 보고 새삼 놀라는 경우가 있다. 파리의 센강, 런던의 템스강, 프라하의 블타바강 등 유명하다는 세계 어느 도시의 강보다 훨씬 거대한 스펙터클이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서민 아파트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렸던 봉준호 감독의 다음 영화가 한강을 배경으로 삼은 <더 리버>(가제)라는 것이 의미심장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어린 시절 강변의 아파트에서 한강을 보며 여러 가지 공상을 했다고 한다. 한강과 아파트로 서울을 인식하는 게 봉준호 감독만의 특별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강변을 따라 줄지어 선 아파트촌을 통과하지 않고 서울을 이해할 길은 없다. 물론 덕분에 강변의 야경은 아름답다. 요즘엔 한강의 다리마다 조명까지 설치해 눈이 부시다. 이 부조화의 도시가 자신을 감추는 화장법이다.

서울은 왜 이리 멋없는 도시냐, 고 투덜댈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불균형과 부조화, 끊임없는 공사와 난개발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서울이다. 종로 뒷골목을 일컫는 피맛골은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청진동 해장국집을 비롯해 빌딩 숲 뒤에 자리잡은 낡고 허름한 식당들은 이 도시의 진짜 얼굴처럼 보인다. 무질서한 간판, 금이 간 시멘트 블록, 허름한 뒷골목엔 시간의 퇴적층이 있다. <한 도시 이야기>의 사진들 속에서 아파트, 한강, 뒷골목은 서울의 세 얼굴이다. 영화 속 서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 <해피엔드> <소름> 등에 등장한 아파트, 김기덕 영화의 한강, 홍상수 영화의 메마른 뒷골목 풍경 등은 그들이 도시 생활자의 현실을 다루는 동안 변치 않을 밑그림이다.

이번주 특집은 ‘영화를 사랑하는 세 도시 이야기’다. 부산, 부천, 전주 등 세 도시는 서울에 없는 어떤 것을 통해 영화도시로 발돋움하려는 곳이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부산엔 바다가, 부천엔 세트장이, 전주엔 적산 가옥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로케이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영화가 또 다른 풍경을 원할 때 그곳엔 익히 모르는 시간과 역사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한 도시 이야기>와 ‘영화를 사랑하는 세 도시 이야기’는 영화가 발화되는 근원지를 찾아나서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