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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저력의 정체

5년 전 한달 휴가를 얻어 유럽에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다. 미술 관련 서적 하나를 들고가 3주간 유럽여행을 하면서 유명한 미술관 몇 군데를 방문했다. 그중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을 잊을 수 없다. 고흐의 그림을 보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미술 관련 서적에서 본 도판에서 전혀 느낄 수 없던, 살아 있는 듯한 생생한 붓질의 느낌 때문이었을까. 평소 고흐의 그림을 특별히 좋아한 적 없건만 그의 삶과 영혼에 델 듯했다. 물론 그건 낯선 경험에서 오는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 유명한 그림들을 직접 대면할 기회가 한번도 없던 한국 촌놈이니 그럴 만한 일 아닌가. 지금 돌이켜보면 굳이 고흐의 그림이 아니었대도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진품의 향취는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전율을 불러온다.

그때 본 미술관 풍경 가운데 기억에 오래 남는 일은 초등학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그림을 보는 모습이었다. 이 아이들은 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직접 보며 자라는구나. 무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머물러 살았던 30년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저렇게 훌륭한 그림을 직접 본 아이들과 나이 서른이 넘어 처음 접한 사람과 얼마나 큰 격차가 있을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게 꼭 미술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유럽의 어느 성당에서 나는 ‘아우라’라는 단어의 의미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수백년 전 지은 성당 안에서 파이프오르간과 성가대의 합창소리가 흘러나올 때 그것은 종교이기 전에 예술이었다. 아마 기독교가 중세의 유럽을 정복한 이유도 그것이 예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성당은 지상에서 결코 맛볼 수 없을 듯한 미술과 음악으로 놀라운 황홀경을 만들어냈다. 절로 두손이 모이고 무릎이 굽혀졌다.

영화문화도 마찬가지다. 파리에 처음 갔을 때 낯선 극장문화에 깜짝 놀랐다. 예술영화를 트는 작은 극장이 많다는 것도 그렇지만 프로그램이 극장마다 다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아니라도 극장마다 타 극장과 다른 영화를 상영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어느 극장을 가나 똑같은 개봉작을 상영하는 우리로선 꿈같은 일이다. 미술관에서 진품을 보며 자란 아이들처럼 파리의 아이들은 필름으로 걸작을 보며 감수성을 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런 문화적 차이가 그들의 문화적 저력을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이번주 기획 ‘파리와 도쿄의 시네마테크 탐방’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기사다).

물론 그렇다고 척박한 토양에서 훌륭한 영화가 나올 수 없다고 단정할 순 없다. 이란영화나 남미영화가 좋은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변방의 영화들이 주목을 받을 때 대체 어디서 문화적 저력이 나오는 건지 의아해진다. 외국인의 눈엔 한국영화도 그럴 것이다. 나부터도 한국영화의 저력이 무엇인지 그 정체가 궁금하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대학로의 전통에서 온 것 같다. 춥고 배고파도 배우가 되고자, 연출가가 되고자 비지땀을 흘리는 이들, 그들이 없었다면 한국영화는 상당히 초라했을 것 같다. 이번주 특집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은 한국영화의 저력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 엿보게 한다. 여기서 주목한 3인 외에도 무수한 연극인이 흘린 땀과 눈물의 역사가 아직 베일 뒤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열악한 환경을 악으로 깡으로 헤쳐가는 한국적 특성은 문화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이번호에는 별책부록이 하나 있다. 10월 개봉영화 가이드와 <> <우리형> 두 영화의 제작기를 모은 책자다. 마음에 드는 선물이라면 또 만들라고 졸라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