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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결정적 순간

<파이란>의 한 장면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 따르면 사진은 결정적 순간을 담는 예술이다. 그가 말하는 결정적 순간은 무엇인가? “한순간에 사건의 의미와, 사건이 비로소 표현력을 얻게 되는 사건의 형식적인 구조를 동시에 얻는 순간을 의미한다”고 <클라시커50 사진가>는 적고 있다. 말이 좀 어려우나 브레송의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바라본 세상이 어떤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스스로는 사진을 찍기 전이나 후에만 생각을 하고 사진 찍는 순간엔 무념무상이었다고 하지만 아마 그의 사진 대부분은 셔터를 누르기까지 많이 기다리고 관찰하고 사색한 결과물일 것이다. 그렇다고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이 무조건 기다리면 좋은 사진이 나온다는 식으로 이해돼선 안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남과 다르지 않다면 결정적 순간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브레송의 사진 가운데 카페에 앉아 있는 마릴린 먼로를 찍은 사진과 미국의 야구장을 찍은 사진이 떠오른다. 두 사진은 구도와 프레임이 특별해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마릴린 먼로를 찍은 사진은 후경에 여배우의 존재에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고 야구장 사진은 프레임의 절반이 야구장 밖에 주차된 차량을 보여준다. 완전히 똑같은 각도로 창공을 바라보는 관중의 시선과 야구장 밖의 평화로운 세계가 균형을 이룬 야구장 사진은 야구를 바라보는 제3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마릴린 먼로의 사진 또한 대상이 되는 세계에서 한발 물러서서 바라본 경우다. 프레임이 마릴린 먼로를 향한 일반인의 시선까지 포함함으로써 흔한 인물사진에서 볼 수 없는 생기가 넘친다. 결정적 순간은 결정적 시각과 결정적 구도없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영화잡지를 만드는 입장에서 촬영현장에서도 결정적 순간을 담은 사진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씨네21> 사진팀도 그런 순간을 담기 위해 불철주야 현장을 뛰어다닌다. 하지만 몇 달의 촬영기간 가운데 하루이틀 몇 시간 현장공개를 하는 상황에서 멋진 촬영현장 사진을 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운이 좋아서 일년에 한번 그럴 수 있으면 다행인 정도다. 몇년 전 손홍주 사진팀장이 <살인의 추억> 촬영현장에서 송강호, 김상경 두 배우가 비를 맞으며 뛰어가는 모습을 찍고나서 너무나 기쁜 목소리로 결정적 순간의 감흥을 전한 기억이 난다. 그 사진은 영화에 포함된 장면이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생동감있고 감동적인 사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점점 드물어진다. 영화 마케팅이 효율적인 관리 시스템을 갖춰나갈수록, 현장취재를 하는 매체의 수가 늘어날수록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사진밖에 못 건지는 환경이 된 것이다.

촬영기간 내내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스틸기사라면 어떨까? 현장에서 찍었지만 영화홍보용으로 간택되지 않은 보석 같은 사진들이 있지 않을까? 어느 날 이영진 기자가 이런 호기심을 회의 석상에 내비쳤다. 늘 현장사진을 대하면서도 일찍이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영진 기자는 곧 스틸기사들을 만나 그동안 빛을 못 본 사진들을 수배했다. 그리고 정말 멋진 사진들을 만나게 됐다. 이번 특집에 실린 한세준, 이상욱, 임훈, 전혜선, 손익청 등 다섯 작가의 사진은 촬영현장의 결정적 순간을 담고 있다. 오래 기다리고 관찰하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들이다. 귀한 사진을 게재하도록 허락해준 다섯 작가분께 감사드린다. 이 특별한 사진전을 얼른 구경하시길….

P.S. 지난 2년간 편집일을 했던 박초로미 기자가 <씨네21>을 떠나 다른 일터로 갔다. 본격적인 영화일에 첫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힘든 일을 묵묵히 했던 그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