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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물난리

올해도 어김없이 물난리가 났다. 흙탕물이 집안 가득 들어찼고 소와 돼지가 강물에 떠내려갔으며 비닐하우스가 주저앉았다. 거동이 불편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산사태가 나도 꼼짝 못해서 흙더미에 깔려 돌아가셨고 집도 가재도구도 몽땅 못 쓰게 된 일가족은 초등학교 강당에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새우잠을 자야 했다. 다시 한번 수재민 돕기 특별방송이 기획되고 천재지변을 어쩌겠냐는 관련 공무원의 말과 그걸 인용보도하며 인재임을 강조하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인데 어째서 이 모든 사태를 올해도 꼼짝없이 앉아서 지켜봐야 하는가. 아마 그건 이 재난이 빈곤한 이들만 괴롭히기 때문일 것이다. 돈이 없어 수해방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그래서 수해를 당하면 가난해지고 다시 가난 때문에 이사를 못해 수해를 당하는 악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긴급구호자금이나 성금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가난과 재난의 동거 앞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전염병 방지용 소독약을 뿌리는 것뿐이다. 집을 잃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늘만 원망하는 것뿐이고.

<괴물>

물난리의 풍경을 보면서 봉준호의 <괴물>을 생각한다. 괴물을 무섭게 내리는 장대비로 바꿔치면 지금 이곳이 괴물이 날뛰는 한강변처럼 느껴진다. 돈없고 백없는 가족은 괴물이 한바탕 난리를 부린 뒤 학교 강당에 마련된 희생자 합동분양소에 모인다. 서로 부둥켜안고 원망하고 통곡해보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도 매캐한 소독약과 격리조치뿐이다. 내 딸이 살아 있다는 아비의 호소에도 관련 당국자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진단만을 내린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말이라면 절대 흘려듣지 않았을 소리가 미친 사람의 횡설수설로 들리는 것이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면 웃기는 상황이다. 괴물을 본 사람, 괴물과 싸운 사람, 괴물한테 납치당한 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의 말은 믿지 않고 괴물을 본 적도 없는 미국의 정보에만 귀기울이니 어찌 웃기지 않을까(<살인의 추억>에서도 미국에서 날아온 유전자 감식결과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괴물>은 이런 상황을 솔직히 그리고 있고 그래서 웃긴다. 그리고 웃으면서 가슴이 아픈 걸 보면 재난에 대처하는 봉준호의 감각은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의 것이 틀림없다. <살인의 추억>에서 경운기가 무심히 결정적 증거를 뭉개고 지나가는 장면의 예처럼 공권력의 한심함과 무능력이 어우러지는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은 <괴물>에서도 여전하다. 그러면서 뭔가 울분이 쌓이고 설움이 복받치는데 그걸 퍼부을 대상은 모호하다. <플란다스의 개>의 소녀나 <살인의 추억>의 두 형사가 그랬던 것처럼 <괴물>에서도 가족의 분노가 집중될 지점은 누구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괴수영화라면 당연히 괴물이 공공의 적이겠으나 <괴물>을 보노라면 가족이 싸우는 대상이 꼭 괴물만은 아니다. 차라리 괴물을 만들어낸 환경과 싸운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 환경은 괴물을 죽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영화에는 어쩔 수 없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아무리 상황이 웃겨도 현실의 비극이 웃음에 자리를 비켜줄 리는 없다.

억압된 것은 돌아온다. 괴수영화, 재난영화, 공포영화 등 다양한 장르영화가 이런 정신분석학의 정의에 따른다. 괴수나 해일이나 귀신처럼 형태는 달라도 그들은 우리가 땅 밑에 묻어둔 것들의 다른 이름이다. 불어난 물에 휩쓸려 내려온 거대한 쓰레기 더미처럼 그것들은 틈만 생기면 언제든 악취를 풍기며 흉한 몰골을 드러낸다. 수해복구반은 올해도 어딘가에 쓰레기를 묻고 소독약을 뿌리는 것으로 응급조치를 취하겠지만 그런다고 내년 홍수를 버틸 수 있을까. <괴물>이 할리우드영화와 달리 현실적인 것은 반가운 일이면서 슬픈 일이기도 하다. 언제나 통렬한 풍자가 향하는 곳은 결국, 가슴 아픈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