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법정 드라마를 권한다
2001-09-28

2001

할리우드에는 법정 드라마가 많다. 부터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 <허리케인 카터>까지 각종 편견에 몰려 누명쓴 사람들이 구원되는 곳으로 그려낸 영화들이 한켠에 있다. <데블스 에드버킷>처럼 정의는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라고 냉소하기도 하고, <데드맨 워킹>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 온당한 거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쪽도 있다. 그래도,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짐작하기에 정의에 자기들의 희망을 거는 영화들이 많아 보인다. 누명쓴 사나이를 구해내는 청년 링컨의 무용담이 그 먼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전파된 걸 보면, 영화가 희망을 창작해낸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이 남자가 살인을 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달빛에 얼굴을 봤다. 이보쇼, 그날은 그믐밤이었소. 위인전 속에서 변호사 링컨의 활약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던가.

적잖은 법정 드라마들은 현실에서 소재를 따왔다. 도색잡지 발행인의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표현의 자유의 영토를 넓힌 래리 플린트 재판, 그 담배에 유해성분이 들어 있다고 폭로한 양심적 내부자에 경청하던 <인사이더> 이야기, 사실이 왜곡됐네 아니네 말은 많았지만 환경을 오염시킨 기업과 싸워 이긴 소시민의 무용담 <에린 브로코비치> 등등. 할리우드는 그런 식으로 미국의 얼굴을, 긍정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해왔다.

한국영화에는 없는 것이 바로 이 법정극의 전통이다. 글쎄, <검사와 여선생>과 <인디안 썸머>가 있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성싶다. <마담 X>를 법정드라마라 부르지는 않으니까. 변호사들을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가 나오기도 했으니 언젠가 제대로 된 법정영화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취향과 유행이 바뀌어도, 할리우드가 법정으로 달려가는 이유는 뭘까. 법적 다툼 자체가 추리의 기쁨을 제공해주는 측면도 있고, 정의가 이기느냐 마느냐를 지켜보는 증인의 특권을 관객에게 제공해줄 수도 있다. 관객에게 스크린은 현대의 콜로세움이다. 그들이 누구를, 무엇을 응원하겠는가.

이야기가 처음부터 많이 빗나갔다. 스크린 밖에서 진행되는 복수와 증오의 발언들에 관해 발언하고 싶었건만. 세계무역센터 테러 직후부터 부시 미국 대통령은 복수와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공언했다. 그에게 할리우드 법정 드라마를 권한다. 진실을 뿌리까지 밝힌 다음 선고를 내려라. 무고한 희생을 막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