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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부산의 에드워드 양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두번 나온다. 첫 번째는 아들이 커닝을 했다는 의심을 받은 다음이다. 학교에선 아들과 친구의 답안지가 같다는 이유로 아들에게 처벌을 내리고 아버지는 이에 항의하러 학교에 간다. 아들은 자신이 친구 답안지를 베낀 것이 아니라 친구가 자신의 답안지를 일방적으로 베꼈다며 억울해하지만 선생님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아들을 믿는 아버지는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진실을 외면하면 어떡하냐며 화를 내지만 소용없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는 말한다. “이번 일이 너에게 좌절이 아니라 긍정적인 계기가 됐으면 좋겠구나. 너의 미래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렸단다.” 두 번째 동행길은 아들이 양호선생님에게 심한 욕설을 한 다음 이뤄진다. 학교를 찾아간 아버지는 진땀을 흘리며 선처를 호소하지만 선생님은 오래전 자신에게 대들었던 아버지를 잊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은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다 퇴학당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말이 없다. 대신 아들이 말한다. “전에 하신 말씀 잊지 않고 있어요. 내 미래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렸다고 했잖아요. 학교를 다니지 않더라도 주간부 편입시험을 볼게요.” 첫 번째와 두 번째 하굣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아버지가 두 번째로 학교를 찾아간 장면 바로 전에 비밀경찰의 고문을 받은 뒤 두려움에 떠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온다. 아들의 미래를 낙관했던 그는 더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지 못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로하는 것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위로하는 것으로 역전된 이 대목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삶의 의지와 용기를 잃은 아버지와 차츰 마음을 다쳐가는 아들. 그들은 미래를 낙관하자는 대화를 나누지만 영화는 그럴 가능성이 없음을 암시하며 진행된다. 과연 그들은 누명을 씌우고 권위로 억누르며 모멸감을 주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그렇게 잔혹한 세상에 찢기고 아파하는 영혼들의 기록이다. 살인사건, 하면 떠오르는 신문기사나 미스터리물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곧고 가녀린 마음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너무나도 사실적인 이야기건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현실이 아니다. <하나 그리고 둘>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가 볼 수 없는 뒤통수를 보여주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에드워드 양의 예외적 작품이라 말하지만 <마종>을 보고나니 그렇지도 않다. 장첸을 비롯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소년들이 좀더 나이든 모습으로 등장하는 <마종>은 코스모폴리탄의 도시 타이베이에서 다시 한번 비극이 벌어지는 풍경을 펼쳐 보인다. 이번엔 코미디가 많이 가미됐다는 차이가 있지만 세상을 보는 에드워드 양의 시선은 여전히 냉정하면서도 따뜻하다. 고문을 당했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아버지가 <마종>에선 갱들에 쫓기며 애인과 도피 중이다. 세상과 타협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60년대 아버지와 달리 <마종>의 90년대 아버지는 세상은 속거나 속이는 정글이라고 믿고 있다. 아버지는 그런 믿음을 아들에게 가르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소년들은 여전히 믿고 의지할 무언가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마음을 다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마종>을 보고나니 <하나 그리고 둘>에서 교차편집으로 보여준 아버지와 딸의 같으면서 다른 사랑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아시아 대도시의 보통 사람들이 맞이하는, 안간힘을 써도 실패를 거듭하는 인생유전. 그래도 살아야 하는 현실. 에드워드 양은 그런 삶의 비애를 한치 빈틈도 없는 견고한 구조물 같은 영화로 보여줬다. 위대한 영화를 남기고 간 그를 기억하는 것으로 부산영화제를 다녀온 소감을 대신하련다.

P.S. ‘냉정과 열정 사이’ 코너의 필자가 다음주부터 김은형, 정이현씨에서 소설가 김애란, 칼럼니스트 김현진씨로 바뀐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김은형, 정이현씨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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