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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숭례문

설연휴가 끝나고 1주일간 숭례문 때문에 난리가 났다. 어딜 가나 숭례문 화재가 화제가 됐고 입 달린 자는 모두 한마디씩 했다.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인데 한국의 상가 어디서나 그러하듯 술 취한 친척들의 고함소리도 여기저기 터져나온다. “이게 다 놈현 때문”이라는 관용구가 있는가 하면 “이명박이 시장 하면서 개방한 거 아니냐”는 성토성 발언이 나오고, “대체 문화재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라는 한탄도 들려온다. 정치권에선 “국민 성금을 걷자”는 말을 했다 거센 반발에 휘말리는가 하면 인수위 정부조직개편안에 노 대통령 퇴임축하연까지 별 관계도 없는 일들이 일제히 숭례문 화재와 연관된 것처럼 들먹여지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숭례문 화재는 비극에서 희극으로 장르를 옮겨가는 느낌이다.

온 국민이 숭례문에 이토록 진한 애정을 갖고 있었는지 예전에 미처 몰랐다. 내가 어느 정도 냉소주의자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숭례문 화재에 대한 반응을 보노라면 숭례문은 거의 9·11 당시 뉴욕 무역센터처럼 보인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조직적 테러가 아닌데도 사태를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닌가 싶은 것이다. 1년 전 여수외국인보호소에서 아무 죄도 없이 쇠창살에 갇혀 타죽은 외국인노동자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것과 비교하면 제 나라 문화재만 값지고 외국인노동자의 목숨은 하찮더냐는 독기어린 말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언제 문화재를 그렇게 아꼈다고 호들갑이냐고 심술 부리고픈 생각도 든다. 세계 어느 도시 못지않게 오래된 도시이면서 세계 어느 도시보다 세월이 쌓인 흔적을 찾기 힘든 도시가 서울이 아니던가. 빨리빨리 갈아엎고 새 아파트 지어서 팔아먹는 데 혈안이 된 우리가 숭례문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숭례문이 국보 1호가 아니었다면 이토록 법석을 떨진 않았으리라. 창의문에 불이 났다면 이 정도로 난리가 났을까? 아무래도 아닐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숭례문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배우고 자랐다. 한국을 알리는 영상이나 사진에서 오랫동안 국가와 도시를 대변하는 중요한 이미지였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실질적 가치와 무관하게 숭례문=대한민국, 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1주일이란 시간이 지나 냉소적인 말을 하고 있지만 나 역시 숭례문 화재를 처음 볼 때 뭔가 굉장히 끔찍한 이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 몸이 타는 것 같은 느낌. 불타 잿더미가 된 숭례문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모두는 거기서 만신창이 대한민국을 보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면 이오지마에 꽂힌 성조기의 이미지가 태평양전쟁의 전운을 바꿔놓았다고 한다. 그만큼 어떤 이미지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데 지금 우리에겐 숭례문이 그렇다. 모두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은 오래된 문화재라서가 아니라 숭례문이 대한민국이라는 무의식의 소산일 것이다. 방화범도 밝혀졌고 사건 경위도 비교적 소상히 밝혀졌지만 불탄 숭례문은 여전히 원인없는 결과로 남아 있다. 이명박의 대운하를 비롯해 노무현의 퇴임까지 무엇이든 갖다붙여도 원인처럼 느껴지지만 진짜 원인은 결코 아닌, 뭐든지 투사할 수 있는 메워지지 않은 구멍인 것이다. 아무도 속시원한 재발방지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우리의 기대가 단순한 문화재 복원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러저러한 진단이 있고 처방이 내려졌지만 하나도 믿음직스럽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숭례문에 내린 진단과 처방이 대한민국이란 국가에 했던 것과 같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숭례문 화재 이후 나온 온갖 이야기들은 흘러간 옛 노랫가락처럼 익숙하다. 그리하여 숭례문은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뀌었다. 물론 희극이 됐다고 소리내어 웃을 관객은 없으리라. 비극에서 희극으로 변한 것 자체가 또 다른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