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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그러니까… 자니?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3-09-06

언젠가 광화문에 자리한 모 술집에서 잡담을 엿들은 적이 있다. “저 앞 사람, 이송희일 감독 아냐?” “누구?” “아니 왜, 트위터에서 맨날 자니? 하는 사람.” “아, 자니? 감독.”

한 1년여 구남친 코스프레를 하며 새벽마다 귀신 씻나락 까먹듯이 트위터에 “자니?” 소리를 종알종알 나열한 대가로 얻은 별명이 ‘자니? 감독’이렷다. 하기는 어느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이 시간이면 이송희일 감독이 ‘자니?’를 할 시간이네요”라는 멘트를 날리기도 했단다. 상황이 이렇듯 우스꽝스러워졌으니 찌질한 구남친 코스프레도 이제 그만둬야 하나 싶었지만 금단현상의 고통을 차마 이겨내지 못하겠다.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외롭고 웃긴 표정을 지은 채 누군가의 귓가 솜털을 간질일 욕망으로 기어이 자니? 하고 속삭이는 것이다. 감히 누가 이 중독을 이겨내겠는가. 근대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중독인 ‘외로움’을.

그러나 용기도 없어 술의 힘을 빌려 ‘자니?’라는 문자를 새벽에 보내는 수많은 구남친들은 연애와 사랑을 인생의 유일한 유토피아로 취급하는 세상에서 결국 패배자의 이미지로 현상된다. 연애라는 정상에서 굴러떨어진 찌질한 시시포스들에 쏠리는 눈길이 자못 까칠하고 매정하다.

어쩌면 당연한 풍경인지도. 솔로를 자기 계발에 실패한 낙오자로 강등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모태솔로를 일종의 장애로 취급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아침저녁으로 모든 매체가 연애와 결혼을 찬양하는 것도 모자라, 수많은 연애상담과 연애특강이 자기 계발이라는 명목으로 솔로와 구남친들을 실패한 루저로 심판하는 시대, 울리히 벡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이 곧 종교가 되어버린 시대’이지 않던가. 사랑이 유일한 교회이고, 연애를 곧 유일한 삶의 구원인 것처럼 칭송하는 이 기이한 근대 세계에서 연애하지 않는 당신들은 구원을 약속받을 수 없다.

전통적 결속 양식이 모조리 휘발된 여기 자본주의 항아리에 유일하게 남은 게 바로 고독이다. 고독이라는 영혼의 검은 입구멍. 고독을 죽음에 이르는 질병으로 단정하는 여기 고립된 단독자들의 세계에서 연애야말로 끝내 유일한 유토피아로 상상된다. 루카치의 한탄은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길의 지도’를 잃어버린 근대 세계의 서글픈 주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연애라는 종교에 귀의할 것인지, 아니면 고독과 외로움을 정면으로 응시할 것인지다. 대안공동체나 실험적 우정공동체를 상상할 게 아니라면, 이 두 가지 선택의 길은 냉혹하리만치 단호하다. 길의 지도를 잃어버린 이 냉혹한 시대의 구남친들은 외로움이라는 바다에 홀로 내던져진 조난자들이나 진배없다. 그들이 보내는 자니? 문자는 애면글면 밤새 손끝을 불태워 홀로 타전하는 구조의 모스 부호와도 같다.

너무 지질하다고 탓하지 마라. 세상의 모든 구남친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연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