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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자유의 삐딱선
이영진 2013-09-02

로버트 알트먼이 <야전병원 매쉬>(1970)를 찍을 때였다. 에이전트가 그를 찾아와 “1주일 뒤면 자넨 끝장”이라고 귀띔했다. 촬영 시작 전부터 이십세기 폭스 중역들의 눈밖에 난 그였다. 해고가 임박했다는 전갈에도 놀라지 않고 그는 짧게 응수했다. “이제 이틀이면 끝나.”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는 에이전트에게 로버트 알트먼은 곧바로 쏘아붙였다. “이 XX놈의 스튜디오와 이별하는 날을 더이상 기다리기가 지긋지긋하다니까.” 피터 비스킨드의 <헐리웃 문화혁명>(2001)에 따르면 로버트 알트먼은 상대가 누구라도 ‘fuck’을 날리는 안하무인의 인간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명령했지만, 누구도 그에게 명령할 순 없었다. 편집기 근처에 얼씬도 말라는 스튜디오의 엄포를 그는 “내가 만지고 싶은 기계는 다 손댈 수 있다”며 간단히 무시했다. 한번은 편집실 벽에 붙여놓은 핀업 사진을 즉시 다 떼내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가 즉시 “주목, 주목, 사진들을 모두 제거할 것”이라는 상부의 메모 내용을 녹음해서 영화에 삽입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어찌할 도리 없는, 반골 중의 반골이었다.

이번호 특집에서 소개하는 할리우드 아웃사이더들 역시 로버트 알트먼과 동류의 기질을 지닌 예술가들이다. 삐딱한 유전자와 불같은 성미를 지닌 그들을 가련한 이방인 혹은 운없는 주변인으로 여기는 것은 대단한 실례다. 그보다 아나키스트라는 명명이 더 적절할 듯하다. 아나키즘의 어원인 그리스어 아나르코스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아나키스트라고 하니, 한 시인의 토로가 불쑥 떠오른다. 그 독백의 주인공은 김수영이다. “머릿속은 방망이로 얻어맞는 것같이 지끈지끈 아프고 늑골 옆에서는 철철거리며 개울물 내려가는 소리가 나네. 이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이 다닥칠 때 나라는 동물은 비로소 생명을 느낄 수 있고, 설움의 물결이 이 동물의 가슴을 휘감아 돌 때 암흑에 가까운 낙타산의 원경이 황금빛을 띠고 번쩍거리네. 나는 확실히 미치지 않은 미친 사람일세그려. 아름다움으로 병든 미친 사람일세.” 로버트 알트먼의 도취와 김수영의 자학은 자유를 향한 순교의 제스처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나키스트는 자신을 경멸함으로써 세상을 능욕하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처절한 구원 의식은 세상을 수긍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범인들에게 이따금 용기와 위안과 경각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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