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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걸으면 글 나온다, 오버!
김민정(시인·편집자)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주(일러스트레이션) 2014-07-22

걸어야 잔다고 했다. 걸어야 산다고 했다. 두 다리를 못 쓸 지경으로 병원에 드러누운 자라면 모를까 걷는 일이 뭐 그리 어려워서 걷기 타령일까 하겠냐만 발로 꾹꾹 땅 디뎌나가는 그 쉬운 일이 작심하자면 또 쉽지 않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걷자 하면 구두 신은 발로 바다 건너 산꼭대기에 자리한 석모도 보문사 마애불까지 씩씩하게 걸어 올라가는 내가 아니었던가. 시꺼멓게 죽어버린 양 엄지발톱을 검은 페디큐어 바른 발처럼 내놓고 자랑스레 샌들을 신은 내가 아니었던가. 연애 말고 걷는 게 메리트로 작용하는 또 한 분야를 말해보라면 거두절미하고 책을 일순위에 놓겠다. 가장 느린 보폭의 소유자이면서동시에 가장 빠른 시선의 관찰자인 글쟁이들에게 산책은 글감을 사냥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몸풀기 같은 것이니까. 한낮에도 한밤에도 느릿느릿 그러나 반짝이는 눈동자로 거리 곳곳에서 어슬렁대는 자가 있다면 이상하다 실눈 뜨지 말고 슬쩍 눈감아주시라.

그러나저러나 대관절 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 늘어진 귀두처럼 서두를 쭉 잡아 뺐는가 하면 실은 실패한 내 다이어트에 대한 토로라 하겠다. 어느 날 한 시인 선배가 내게 귀띔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만 걸어. 일주일 만에 3kg은 거뜬하게 빠져. 늘어지는 뱃살과 불어나는 나잇살에 한숨 푹푹 쉬던 나였으니 그 빤한 말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그리하여 그날로 휴대폰에 걷기 어플을 다운받아 내 스텝 수를 밟아나갈 수밖에.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묶고 밤거리에 나섰다. 여느 일상 같았으면 밀린 집안일이며 못다 해서 챙겨온 회사 일에 여념이 없었으련만 일단 집 밖을 나서고 보니 맡게 되는 바람 냄새부터가 달랐다. 그 바람에 살살 휘어졌다 펴지는 나뭇가지의 흔들림도 가지마다 가지가지임이 느껴졌다. 스텝 수가 2240보쯤 찍혔을 때 번화가의 한 카페에 도착했다. 날이 무더워서인지 늦은 밤까지 어린아이 얼굴만 한 빙수가 만원이 훌쩍 넘는 비싼 가격임에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가족인 듯 연인인 듯 머리를 맞대고 빙수를 퍼먹는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정겨워서 한참을 바라보게 만드는 바, 어느 순간 나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그네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남의 애정사와 가정사에 말없이 참견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작심 3일을 보태 근 열흘간을 밤마다 한 시간씩 걸었지만 오히려 내 몸무게는 늘어났다. 떡집에서 떨이로 준다는 말에 앉은자리에서 먹어치운 꿀떡이 몇개던가. 대신 새벽 4시부터 시작된다는 떡집 주인의 고단한 일상은 내가 좀처럼 추측하기 힘든 이야기보따리였다. 통닭집에서 한 마리 값에 두 마리 준다는 말에 휘파람 불며 포장을 기다리던 게 몇날이던가. 대신 통닭집 아줌마네 등이 굽은 큰아들이 국제결혼을 전제로 맞선을 거듭한 끝에 다음달 페루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은 내가 좀처럼 지어낼 수 없는 이야깃주머니였다.

아무래도 그 선배 내게 시를 쓰게 하려고 걷기를 미끼삼은 게 아닐까. 시를 쓰면 빠질 살임을 알고 권한 건 아니었을까. 모름지기 못나도 선배는 선배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