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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권력과 공감
정희진(대학 강사)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주(일러스트레이션) 2014-08-05

며칠 전 감옥에서 출소한 후배를 만났다. 그는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기피’했고 1년8개월 간 옥살이를 했다. 세월의 차이를 느꼈다. 내가 대학생 때 구속된 친구들은 수감 전 취조단계(고문)가 길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진작 감방은 고대하던 곳이었다. 경험담을 말하는 친구도 드물었다. 그 시절과 달리 이번엔 감옥 생활을 섬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역시 감옥은 좋은 의미든 아니든 인생 학교였다.

송해성 감독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은 공지영의 원작 후반부에 집중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책에는 주인공 남동생이 성폭행당하는 내용이 있다. 소년은 어떤 무리에 의해 자위를 강제당한다. 책을 읽었을 때 가장 많이 울었던 장면이다. 두려움에 떨던 소년의 창피하고 서러운 눈물. 소년의 눈동자는 어디를 응시하고 있었을까. 얼마나 형이 간절했을까. 그렇게 가슴이 아팠다.

후배의 이야기 중 내가 충격을 받은 부분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수감자들의 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남자 교도소에서는 <우행시>가 포르노로 분류되어 그 페이지가 다 찢겨져 있단다. 많은 이들이 성적 흥분을 느껴서 ‘성욕 증진용’으로 보관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 수치를 쾌락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그들 역시 언제든지 같은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말이다. 소년이 겪은 일 못지않게 끔찍한 것은 약자끼리 가해자가 되는 현실이다. 성폭행 장면을 읽으면서 성욕을 느끼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여성 수감자도 소년의 지옥을 읽고 즐거웠을까. 이들은 단순한 마초가 아니라 ‘레 미제라블’이다.

일상적 갈등이든 대형 사고든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기 마련이고, 누구의 상황과 동일시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사람마다 공감(empathy) 능력의 차이가 있다. 남의 경험과 나의 인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버티고 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개인이 있고 사회는 공감의 공동체를 추구한다.

‘세월호’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후 계속되는 문제는 공감의 정치학이다. 우리는 유가족, 관련자들의 고통에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인간의 공감 용량은 얼마만큼일까. 나는 이 의제가 세월호 ‘해결’의 첫 번째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일부 인사들의 잇단 망언은 ‘개념’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약자, 희생자, 소수자와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몸의 자연스러운 능력인 다른 몸과의 연결, 교류, 삼투압 작용이 없는 비인간(적)이다.

공감은 지적, 감정적, 인격적 능력. 종(種)으로서 인간이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다. 권력 행사로서 공감 무능력. 이들에게 “국민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인간은 고통과 상대의 반응(리액션), 이 두 가지 경우에만 변한다. 그들의 몸을 변형시킬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