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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이 세상에 단골 없으면 무슨 재미로
김민정(시인·편집자)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주(일러스트레이션) 2014-08-19

늘 정하여 놓고 거래를 하는 곳. 그곳이 어디인가. 그렇다. 단골집이다. 이 빤한 물음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당신의 단골집은 어디인가. 물은 사람이 나니까 자진해서 답을 해보려니 움찔하게 된다. 몇 군데 밥집과 술집과 커피집이 스쳐갔으나 내가 단골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가늠을 해보자니 주춤 물러나 숨는 게 내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하루 휴가를 내어 내 살던 인천에 가 아빠와 데이트를 했다. 설렘으로 운전대를 잡은 아빠가 이 골목 저 골목을 돌고 돈 끝에 나를 내려놓은 곳은 50년 전통을 자랑한다는 플래카드가 붙은 ‘서울식당’이라는 간판 앞이었다. 퇴사하고 한번도 안 왔으니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기억이나 하려나…. 수줍게 가게 문을 들어서는 아빠였는데 오목조목 참 예쁘게도 생긴 중년의 아줌마가 댓바람에 알은척을 하는 거였다. 어머머, 이게 누구래요. 그럼요 저희 집 일주일에 서너번은 오셨는걸요. 오랜 단골이셨어요. 개수대에서 양파를 까던 또 다른 아줌마도 그 매운 손으로 아빠 손을 덥석 잡았다. 나요, 나 뺑끼. 빨간 립스틱 진하게 바른다고 나를 뺑끼라고 불렀잖아요. 술 오달지게도 잡수시더만 오매 아직 살아 계시네.

30년 단골이었으니 그 세월만큼 함께 들락거리던 사람들이 많았을 거고 또 그만큼 그들의 나이도 들어버렸을 터, 성성한 흰머리에 자글자글 주름진 얼굴의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 듣고 있자니 화제의 대부분이 생사의 확인이었다. 장사 함께하던 시어머니는… 아직 정정하니 건강하세요. 왜 대머리인데 2 대 8 가르마해서 이주일 닮았던 그 주임님은… 췌장암으로 간 게 꽤 되었는걸요. 살았거나 아님 죽었거나, 나이 칠십에 나눌 수 있는 인간사 근황 토크는 일단 이 정리부터 되어야 칭찬이든 뒷담화든 할 수가 있겠구나. 가게 문을 나서는데 아줌마가 그랬다. 내가 간이랑 뼈에 좋다는 거 누구한테 들어서 섞어 끓이는 게 있으니 다시 오세요. 그거 한 사발 잡숫게. 아빠의 단골집을 들렀을 뿐인데 둘째고모네 집에서 열두첩 수라상을 얻어먹은 듯한 이 기분은 대체 뭐지.

며칠 전 <오빠는 풍각쟁이>의 가수 최은진 선생의 안국동 문화공간 ‘아리랑’에서 술을 마시는데 밤 12시가 다 되어 가게 앞에 택시 한대가 섰다. 그 밤에 백발에 허리가 살짝 휜 한 어르신이 가방에서 뭔가를 우르르 쏟는데 보라색 가지에 보라색 양파가 나오는 것이었다. 유기농으로 키운 이 귀한 자연을 단골집 친구에게 부려놓고 어르신은 갈증에 겨웠는지 맥주 딱 한캔만 마시고 가겠노라 했다. 가지와 양파 값이유. 오랜 단골이자 오랜 주인의 물물교환으로 껍질을 막 벗겨 썬 아삭아삭 양파를 된장에 찍어먹는 새 안주상으로 호사를 누린 건 나였지만 뭐랄까,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귀여운 시추에이션이 말할 수 없이 귀한 산물이라는 판단에는 확신이 들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그 ‘정’이 특별하게 재현되는 곳, 우리들 저마다의 단골집은 오늘도 안녕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