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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착한 주인’이면 다 되는가

SK그룹 최철원은 야구방망이로 노동자를 두들겨팼지만, 재판부는 끝내 실형을 면제해줬다. 대신 검찰은 폭행 피해자를 업무방해죄 등으로 기소했고, 기소 검사는 이듬해 SK건설 전무급 임원으로 영입됐다고 한다.

재벌이라는 성부 아래, 그들을 모시는 법피아와 관피아가 끈끈한 상부상조의 삼위일체를 이루는 모양새랄까. 재벌 2세들이 대놓고 갑질할 만하겠다. 대한항공 조현아가 아무리 비행기를 돌려세워도, 음과 양으로 보필해줄 국토부가 버티고 있었을 테니 땅콩쯤이야 뭔 대수였겠는가. 심지어 저기 강남 아파트 부유층들은 경비원에게 빵을 집어던지고, 그가 분신자살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파트 경비들을 모조리 해고하는 세상이다.

바야흐로 중세의 귀환. 자본과 관료와 법이 씨줄, 날줄로 엮여 권력을 독점하면서 ‘슈퍼갑’들이 도래하고 있다. IMF를 경유하며 공고화된 신자유주의, 그리고 MB 정권부터 본격화된 친자본 정책들이 결과한 당연한 풍경. 노동자를 머슴으로 취급하며 인격을 박탈하고 ‘존재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전근대의 영주들과 다를 바 없다. 상황이 이러니 그 가신들도 사방 도처에서 갑질의 시대를 향유할 수밖에. 무릎을 꿇리고, 볼펜과 서류철을 집어던지고, 성추행을 즐기며, 해고 통지를 카톡으로 물수제비처럼 날리는 저 지독한 갑질들.

혹자는 그래서 시민들이 분노하고 조현아를 고개 숙이게 하지 않았냐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뭐가 바뀌었나. 단지 대중의 땅콩만 한 정의감을 투사할 스캔들로 소비되는 건 아닐까, 혹시 우리는 그저 ‘착한 주인’을 원하는 건 아닐까.

이 불안한 ‘기우’는 오체투지에 나선 노동자들을 향해 쏟아내는 자칭 착한 시민들의 차가운 비아냥 앞에서 ‘확신’으로 굳어진다. 살기 위해 굴뚝 허공에 매달린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을 대하는 대중의 텅 빈 무표정을 보면 왜 저렇게 전근대의 갑질이 설치는지 그 핵심의 맥이 잡히지 싶다.

항공노조나 운송노조의 힘이 강했다면 조현아가 저렇게 설칠 수 있었겠나. SK그룹에 협상을 강제할 노조가 있었다면 과연 최철원이 야구방망이를 들 수 있었겠나. 자본주의란 자본과 노동자의 ‘계약’ 관계가 핵심이다. 한국은 노동의 힘이 서럽도록 미약한 사회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정작 장시간 노동을 하고 혹독한 갑질에 눈물 흘리면서도,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차가운 길바닥을 기어다니는 노동자들에게 냉소를 쏟아내는 이율배반의 파토스에 중독되어 있다.

서글픈 자기부정이다. 자기부정을 하는 노예는 주인에게 스스로 영원히 속박될 수밖에 없다. 갑질이 역겨운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돌파하기 위해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저기 오체투지의 길바닥이고, 저기 저 굴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