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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일찍 일어나는 새, 일찍 일어나는 벌레
정희진(대학 강사)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주(일러스트레이션) 2015-06-02

민규동 감독의 <내 아내의 모든 것> 초반, 임수정의 대사는 압권이다. 특히 두 가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그럼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뭔가요?” 또 하나는 류승룡이 속옷 차림으로 우유통인지 가스통인지 메고 지나가자 이선균이 “저 남자 멋지지 않아?”라며 아내를 떠본다. 그녀 왈, “미친 거 아냐? 한겨울에 왜 옷 벗고 XX이야”. (정확한 대사는 아니다.) 얼마나 웃었던지 다음 장면을 놓쳤다. 그녀의 대사는 소통의 의미를 압축한다. 우리가 흔히 대화라고 생각하는 소통(疏/通)의 ‘소’는 ‘트다’는 뜻도 있지만, ‘거칠다’, ‘멀다’(소외)라는 의미도 ‘만만치 않은’ 글자다. 그러니 소통은 “안 통한다”는 뜻도 되고, 실제로 우리는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산다. 언어를 만든 자의 권력이 그 이유 중 하나다.

새가 아침 일찍 일어나면 벌레를 더 잡아먹을지 모르지만, 벌레가 일찍 일어나면 그만큼 빨리 죽는다는 의미다. 벌레 입장에서 이른 기상은 재앙이다. 이는 단순히 다양한 관점, 입장 바꿔 생각하자는 이슈가 아니다. 생사의 문제다. 적대와 모순인 새와 벌레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서 벌레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포식자 입장에서 사고하게 된다. 그나마 자본과 노동, 서구와 비서구 등의 지배/피지배 관계는 ‘제대로’ 인식되는 편이다. 장애와 비장애, 동성애와 이성애는 배려와 관용으로 왜곡된다.

하이라이트는 성별 권력 관계, 젠더다. 내가 ‘여성계’(남성계라는 말은 없다) 주변에 살면서 23년간 지치도록 설명해야 했던 이야기, “남학생 휴게실은 왜 없냐”, “매 맞는 남편도 있다”. 최근에는 5천년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혐오(misogyny) 현상과 같은 급으로 ‘남성 혐오’까지 등장했다.

새와 벌레의 관계는 ‘생태계’라고 생각하므로 벌레의 관점을 옹호해도 정치적 행위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인간사회에 적용하면 끔찍하다. 부자가 일찍 일어나면 돈을 벌고, 가난한 자가 일찍 일어나면 그만큼 착취당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조차 노동-생산 중심의 자본주의 시절 이야기이고, 지금처럼 금융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다.

한편, 극중 류승룡처럼 멋지게 벗었다거나 대단하게 차려입었다는 자의식에 가득한 이들이 있다. 문제는 그런 드레스 코드가 꼴불견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TV를 켜면 미인들이 그득하다. 그러나 내겐 성형 도플갱어, 무섭게 느껴진다. 외모나 옷차림에도 맥락이 있다. 대체로 남성들은 자기 외모는 성찰(?)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인권을 외모로 결정한다. 그 기준에 부응할 때 여성은 인간의 얼굴을 갖지 못한다.

인생고의 근원은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타인의 인식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저들을 알게 하소서, 저들의 눈을 열어보게 하소서.” 영원한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