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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어처구니를 찾아서
김혜리 2015-08-13

※<암살>과 <베테랑>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저 사람은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여차하면 정말 죽을 참이야.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서도 여전한 톰 크루즈의 극한 스턴트를 지켜보다 생각했다. 언젠가 필히 굴복해야 하는 육체의 노쇠가 다가오는데도 감속을 고려하지 않는 인간. 그 모습이 불러오는 위태함이 이 스타가 계속 대중의 시선을 붙드는 이유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위험한 액션에 불나방처럼 끌리는 그의 행보에는 프로다움 외에도 심리적 문신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톰 크루즈는 네댓살 무렵 높은 나무에 기어오르며 ‘스턴트’를 시작했고 여덟살 때는 동네 공사장 고철더미를 향해 자전거를 날렸다가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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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은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추억하게 만든다. 두 작품에는 처지와 성향은 달라도 식민지 상황에서 가해지는 일방적 폭력과 착취 앞에 한 시절 뜻을 모으고 상처를 나눈 사람들이 등장한다. 140분 남짓한 <암살>은 TV 대하드라마의 여유는 누리지 못한다. 인물들이 ‘작전’ 바깥에서 살았던 시간을 담을 여력은 없다. 그래서 인물의 입장을 함축하는 ‘고딕체’의 대사가 긴요해진다. 청년 독립투사였다가 변절한 염석진(이정재)은 “해방이 될 줄 몰라서 그랬다”고 말한다. 구구하지 않아 좋다. 좀더 상세한 변명은 1933년 상하이 아편굴 장면에 있다. 궁지에 몰리고 약에 취해 잠깐 연약해진 염석진은, 자금줄에 따라 분열된 독립군의 현실을 거론한다. 살아 있는 동안 승리는 무망하고 독립 투쟁은 어차피 파벌 싸움의 회색 난장이 돼버렸는데 사적인 영달을 추구한들 뭐 그리 검겠느냐는 합리화 과정을 짐작하게 된다. 매국한 아버지와 절연하고 무소속 청부 살인업자가 되어 떠도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도 현실인식은 염석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그는 이곳의 특정 진영에 투신하거나 자기를 팔지 않고, 여기 아닌 먼 곳(하와이)으로 가고자 한다. 진정한 목표를 상실했으니 탈출의 티켓을 살 돈만이 그가 하루하루 사는 동력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청부업자가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에게 묻는다. 이런다고 해방이 되냐고. 옥윤은 이미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 같다. “모르지, 그래도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운다고.” 옥윤의 명제는 하와이 피스톨의 명제를 흔들어놓는다. 염석진의 마지막 덫에 걸린 하와이 피스톨이 총탄으로 너덜너덜해진 몸을 끌고 (이기지 못할지언정) 기어이 칼을 상대의 가슴팍에 꽂는 모습이 강렬한 까닭은 그가 옥윤의 명제를 아주 미약한 형태로, 또한 매우 필사적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칼은 몇분 전 이별하며 남자가 여자의 눈꺼풀에 남긴 키스보다 훨씬 열렬한 사랑의 선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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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암살>은 주제를 움켜쥔 캐릭터 안옥윤을 결정적 순간에 과보호해 운명의 주체로서 이 인물이 보유한 돌파력을 약화한다. 부와 작위를 얻으려고 어머니와 언니를 살해한 친일파 아버지 강인국(이경영)에게 마침내 총구를 겨누고도,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은 다른 남성 인물의 몫으로 넘어간다. 아예 강 사장이 총격전 와중에 제3자에게 목숨을 잃었다면 모르지만 옥윤을 굳이 선택의 자리에 데려다놓고 회피하는 귀결이니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선행된 전개를 돌이켜봐도 이상한 결정이다. 강인국은 집안을 위해서였다며 가장의 책무를 강조하지만 실상 그에게 집안의 실체는 오직 자신이다. 아내는 피가 안 섞였으니 버릴 수 있다. 핏줄 중에서도 정략결혼에 유용한 미츠코(전지현)만 딸이고 입신에 방해가 되는 옥윤은 고민 없이 죽여도 좋은 대상이다. 심지어 독립군 암살단에 습격당하는 장면에서는 미츠코보다 일본군 사령관을 먼저 챙기는 모습도 보인다. 옥윤 역시 작전의 타깃인 매국노가 생부라는 사실을 알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옥윤의 어머니(진경)는 일찍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강인국에게 반문한 바 있다. “당신은 왜 죽으면 안 되죠?” 아버지는 어머니와 딸을 죽이는데 딸은 그대로 돌려주면 안 되는 까닭은, 여주인공의 손에 피- 패륜- 를 묻히기 겁내는 보수적 관행 말고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꼼꼼한 감독은 살부계 복선으로 이 장면을 지탱하고자 한다. “살부계에 가담한 사람들은 잡혀가거나 자살하거나 나처럼 됐어. 당신은 그러면 안 되잖아?”라는 하와이 피스톨의 대사가 곧장 뒤를 받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살부계는 본인의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못한 사람들이 택한 대안이었으므로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도 아니다. 이 장면까지 ‘대장’으로 불렸던 옥윤은 비틀거리며 퇴장하고 그녀의 시선도 한동안 영화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1945년에 동료 독립군 명우(허지원)와 함께 염석진을 저격하러 돌아온다. 여기서 그녀는 염석진 때문에 목소리를 잃은 명우의 수화를 통역하는 대사로 본인의 말을 대신한다. 직접적 감정을 차단한 이 연출은 독특한 임팩트를 낸다. 그러나 안옥윤이라는 주인공의 활력과 무게를 회복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마무리다. 1933년 이후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 해방 공간에서 이제 어디로 갈 것인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경성 작전에 대한 옥윤의 추억을 몽타주한 플래시백이 보완을 꾀하지만 굳이 에필로그가 있어야 한다면 그보다는 후일담쪽이 이 캐릭터를 분명히 각인하고 그녀를 통해 관객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지을 수 있도록 힘을 더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주제넘는 상상까지 부추겼다.

08/02

노동단체에 가입한 후 하청업체로부터 계약을 해지당하고 밀린 보수도 못 받은 화물운송기사(정웅인)가 대기업 본사를 찾아가 1인 시위를 한다. 창업주의 손자이자 신진물산 기획조정실장인 조태오(유아인)가 그를 사무실로 불러올리고 몇 시간 후 배 기사는 비상계단에서 추락한 채 발견된다. 아내는 “가진 것 없는 놈이 항의하는 법은 이것뿐”이라는 요지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다. 당사자가 의식이 없는 가운데, 분을 못 이긴 노동자의 업무방해라는 신진물산쪽 주장을 광역수사대 서도철 형사(황정민)가 물고 늘어진다.

<베테랑>은 서도철의 대사로 두번에 걸쳐 핵심적 질문을 던진다. 너희 왜 이렇게까지 해? 재벌들, 욕먹는 거 익숙하지 않아? 폭력사주 죄는 형량도 무겁지 않은데 깔끔히 사과하고 보상하면 될 것을 왜 구태여 판을 위험하게 벌여가면서 잡아떼지? 이 질문은 관객인 내게도 영화의 1차 과녁을 분명히 파악하려면 풀어야 할 매듭이었다. 특권층으로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는 굴욕을 용납 못하겠다는 아집이 컸을까? 아니면 영화 후반 드러나는 중죄를 덮으려는 조치일 뿐이었을까? 이 밖에도 류승완 감독에게 묻지 않고는 풀 도리 없는 몇몇 문제를 이메일로 질문했다. 답신 대신 주말 오후 가볍게 걸려온 전화는 인터뷰 아닌 인터뷰로 변질(?)됐다. 류승완 감독은 조태오를 보좌하는 최 상무(유해진)와 조태오 본인의 동기를 구별했다. “최 상무의 동기는 후자다. 진짜 범죄를 실무자로서 덮으려고 한다.” 관련해서 나는 신진물산 사람들이 왜 배 기사의 절명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는지 몹시 궁금해 시사 직후 감독님께 문의했었다. 죽지 않은 걸 알지만 투신으로만 위장하면 병원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라는 대답이 더욱 서늘했다. 가진 자들에게 세상은 안전하다. 비상구와 급행 티켓이 항상 준비돼 있다. 막판의 자동차 추격전에서 행인과 다른 차를 깔아뭉개는 조태오의 폭주는 출국 비행기를 타려는 당면 목표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거치적거리는 검불들을 떼어내려는 신경질적 발작이다. 자신이 어지른 장소를 치워본 적 없는 인간의 태도다. “조태오는 정확히 말하면 머리를 조아리기 싫다기보다 뭐가 잘못된 일인지 모르는 친구다. 거저 돈을 주면 거지에게 적선한 것처럼 되니 정당하게 받아가라고 주먹싸움을 시킨 거라고 생각한다. 피투성이가 된 배 기사에게 ‘아유, 이게 무슨 꼴이에요’라고 안타까워할 때 그는 진심이다. 비서나 법인카드를 통하지 않고 지갑에서 수표를 손수 꺼내주는 행동도 나름 친절한 제스처다. 조태오가 행동하는 동기 가운데 두려움은 없다. 단지 형사가 따라붙는 이 상황이 귀찮고 친구들 앞에서 얼굴 깎이는 일이 창피할 뿐이다. 그럼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걸 과시하고 싶어 그 와중에 파티까지 연다. 조태오가 가진 유일한 두려움은 이따위 ‘문제’도 스스로 처리 못하는 놈으로 평가돼 회사 권력 승계에서 밀려나고 결과적으로 갖고 싶은 것들을 못 갖게 되는 상황뿐이다. 그는 무서운 게 아니라 계속 짜증나고 어이없는 것이다.” 류 감독의 설명이다.

맞다. 조태오는 배 기사에게 “어이가 없다”는 표현의 어원에 대해 일장 해설한다. 그런데 그는 잘못 알고 있다. 맷돌의 손잡이는 어이가 아니라 어처구니다. 조태오는 서 형사와 드잡이 끝에 쓰러진 마지막에도 이 말을 반복한다. 혹시 옥에 티? 류승완 감독은 보일 듯 말 듯한 디테일이라고 밝혔다. “조태오는 어이와 어처구니를 구분할 이유가 없는 친구다.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끝까지 그게 맞는 거다.”

08/03

내친 김에 악역 조태오의 퍼스낼리티에 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조태오는 밉상이다 못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절대악 캐릭터로 오인되곤 하지만 관찰과 취재로 탄생한 인물이다. 괴물이라 불릴 수 있을지언정 후천적 괴물이다. “하다못해 평범한 부모가 교육을 잘못해도 배려를 모르는 아이가 된다. 아이가 식당에서 뛰어다니는데 방치하면서 옆 테이블 사람한테 때찌때찌 해달라는 부모도 봤다. 그런데 조태오의 경우는 그릇된 교육의 규모가 다르다. 가족뿐 아니라 특권을 용인하는 사회 시스템 전체가 그를 키웠다.” 첩의 자식, 마약 중독이라는 설정까지 꼭 필요했을까? “취재 결과 본인의 콤플렉스와 콤플렉스에 대한 내부자들의 배려 때문에 ‘서자’가 문제를 일으키는 예가 실제로 많았다. 마약은 필요한 것을 다 소유하고 원하는 걸 즉각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쾌락을 극대화시키는 수순이다. 조태오는 미식가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취향이 고루 발달한 인물이다. 첼시FC의 런던 경기를 보고 싶으면 곧장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다. 아끼고 모아서 어쩌다 누리는 사람들과 달리 언제든 즐길 수 있으니 즐길 때 쾌감을 최고치로 올리는 방법에 끌렸을 것이다. 형제들과 기업 경영 성과를 겨루는 스트레스도 있다. 월 스트리트에도 마약 상용자가 많다고 한다.” 퍼뜩 떠올랐다. <완득이> 개봉 무렵 나는 배우 유아인에 대해, 리버 피닉스처럼 사라져버릴 것도 같지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위태로움을 안은 채 스크린 속에서 질기게 나이 들어 갈 것도 같다고 쓴 적이 있다. 재미있게도 <베테랑>의 유아인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디카프리오의 최근 스크린 이미지와 만난다. 노예들을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고 구경하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농장주 캔디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약에 취해 뒹구는 조단 벨포트가 그들이다. 다행히 <베테랑>은 악역을 복합적으로 만들다가 길을 잃는 패착은 범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조태오의 행태와 심리적 기제는 제시하지만 그것을 들여다보는 데에 시간을 쓰진 않고 “아 알겠는데, 됐고, 공공의 규칙은 지키라고. 네 스트레스 해소한다고 남 다치게 하지 말라고” 하며 스토리를 쑥쑥 밀고 가는 영화다.

젊고 매력적인 남성 스타가 많지만 내게 있어 청춘의 얼굴을 대표하는 한국 남성 배우의 계보는 정우성에서 류승범, 다시 유아인으로 이어진다. 이중 정우성은 지금까지도 재벌 아들이나 소위 ‘실장님’, 조직 폭력원을 연기한 적이 없다. 역시 가진 것 없는 반항아로 페르소나를 축조한 나머지 두 배우는 공교롭게도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권력을 쥔 악역을 연기했다. 무슨 성장 의례 같기도 하다. 곁에서 지켜본 유아인과 류승범의 악역 안타고니스트 연기는 어땠을까? “두 배우는 공통적으로 기득권에 대한 저항감을 내면화하고 있고 그런 힘에 숙이고 사는 것을 쪽 팔리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 본인이 연기하게 된 캐릭터에 대해 애정이 전혀 없었다. (웃음) 보통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는 나빠진 사연을 표현해 연민을 얻을 여지를 부여받고 싶어 하는데, 그게 없다. 차이는, 승범이는 내적인 저항의 태도가 외모에 그대로 드러나는 배우인 반면, 유아인은 순응적일 것 같은 천진한 미소와 잘생긴 외모 안에 저항감이 뭉쳐져 있다. 아마 청춘 스타로서 누리고 있는 생활과 인기 이면에 여전히 주류와는 다르고 싶은 기운이 본인에게 있어서, 이 통제되지 않는 재벌가 인물을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류승완 감독의 견해다. <부당거래>에서 검사로 분한 류승범이 골프 웨어를 걸치고 기름진 대사를 근사하게 소화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나는 <베테랑>에서 부티를 흘리며 유들거리는 유아인을 보며 흥겨웠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젊은이에게만 허락된, 세상을 통째로 디스할 수 있는 권력, 결백한 긍지, 아웃사이더이되 자기쪽에서 건물 안의 다른 사람 모두를 따돌리는 아웃사이더의 오만. 유아인이 보유한 자질은, 세상을 발 아래로 보는 캐릭터 조태오의 생활 감각을 표현하는 데에 유효적절하게 쓰였다. 물론 이 배우의 성공적인 최근 몇년간의 커리어와 그것이 가져다줬을 경험도 연기의 보이지 않는 자료가 되었을 터다. (다음에 계속)

<무민 더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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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무민은 핀란드의 작가이자 삽화가, 조각가인 토베 얀손이 창조한 캐릭터들이다(주의! 하마가 아니다). 입은 없지만 둥그런 턱선 덕에 항상 벙글벙글 웃는 인상이다. 무민 가족은 호빗처럼 소박한 일상을 즐기는 한편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양성의 타고난 옹호자다. <무민 더 무비>에서는 프랑스의 화려한 휴양지 리비에라로 간 가족이 허영에 관한 몇몇 교훈을 얻는다. 동물과 인간, 무민이 구분 없이 어울린 이 만화의 소우주에서는 누구나 정체성을 인정받고 터부 없이 사랑한다. 예술가 집안에서 개방적으로 성장해 동성 파트너와 긴 세월을 함께한 얀손의 자유롭고 자족적인 삶이 반영된 풍경이다. 리비에라에서 무민 엄마는 고양이만 좋아해서 외로운 개를 만난다. 개 좋다는 고양이 찾기에 실패한 엄마는 할 수 없이 고양이로 분장한 개를 데려온다. 물놀이를 하다가 줄무늬가 지워진 (동성의) 친구를 본 개의 반응은 예상 밖이다. “너, 줄무늬가 없어도 예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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