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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셀마>와 <암살>을 보며, 잊지 않는다는 것
주성철 2015-08-21

영화가 시간의 예술인 이유인 것은 다루고자 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이루는 단면들의 총합으로서다. 한 영화의 러닝타임이란 결국 감독이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고른 순간들의 모음이란 얘기다. 최근 본 영화들 중에서는 에바 두버네이의 <셀마>가 다룬 마틴 루터 킹의 바로 그 시간이 궁금했다. 감독은 하필 왜 1965년 셀마의 에드먼드 브리지로 향한 것일까.

아마도 <셀마>를 보면서 많은 관객이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그 유명한 연설이 나오는 순간을 기다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연설이 있었던 워싱턴 대행진은 1963년의 일로, <셀마>가 셀마 몽고메리 행진을 다루며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1965년 이전의 일이다. 또한 1965년은 마틴 루터 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후의 시간이며, 그로 인해 존슨 대통령이 노예해방(1863) 100년 만에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인권법에 서명한 이후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미국 내 흑인 인권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여겨지는 시점일 텐데, 영화 초반부에서 보듯 남부 앨라배마의 한 침례교회에서 백인들의 폭탄 테러로 겨우 열살이 지난 흑인 소녀 4명이 숨지고 만다. 존 콜트레인은 그 슬픔과 충격으로 <앨라배마>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신참 목사였던 마틴 루터 킹이 새로운 흑인 지도자로 부각되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로자 파크스로 촉발된, 1955년 몽고메리에서 있었던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으로 흑인 민권운동이 본격화되면서다. 말하자면 <셀마>는 마틴 루터 킹이 등장한 지, 무려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10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다. 후반부에 한 청년은 10년 전 몽고메리에서 혈기왕성했던 그의 연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틴 루터 킹 스스로 인정하듯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상도 변했고 그도 변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종종 지쳐 있고 적당히 타협하려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래서 1965년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향하는 그 행진은 바로 마틴 루터 킹이 10년 전의 자신과 마주하러 가는 여정인 셈이다.

<셀마>가 다룬 시간을 통해 굳이 초심이라는 얘기를 꺼낸 이유는, 계속 잊지 말고 살자는 생각에서다. 올해 상반기 개봉한 여러 한국영화들에서 그런 화두를 끌어안은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은 현실의 반영으로서 무척 의미심장하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날, 마치 운명처럼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암살>을 통해 김원봉(조승우)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뜻깊었다는 얘기에 깊이 공감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김원봉은 잊지 말자는 다짐으로 조심스레 입을 연다. “너무 많이들 죽었어요. 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 그러면서 백범 김구 선생을 시해한 암살범 안두희를 정의봉(正義棒)으로 응징한 박기서 선생에 대한 영화를 준비했던 임순례 감독의 미완의 작품도 문득 떠올랐다. 그렇게 올해 첫 번째 1천만 영화가 된 <암살>에 축하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