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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만만한 듯 어려운 듯
정희진(대학 강사) 일러스트레이션 김은희(일러스트레이션) 2015-08-25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2002)에는 명대사가 넘친다. 박해일의 “그 남자랑 자지 마요, 나도 잘해요”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소설가를 꿈꿨지만 출판인으로 살아가는 문성근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란 말야, 평생을 팔아먹을 수 있는 상처가 있어야 해. 근데 나는 너무 행복하거든. 그래서 포기했지.”

여성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니 상처의 영어 자막이 “wound”였다. 이 단어는 자상(刺傷), 베인 곳이 깊어서 뭔가 고여 있다는 느낌이다. 그 공간이 치료되지 않은 채 평생을 사는 것이다. 문학이 아니더라도, 모든 글쓰기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되는 생각’이 계속 샘솟아야 한다. 인간에게 그런 생각은 원한, 분노, 억울함, 한(恨) 등 ‘범(汎)상처 계열’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창작자는 연애와 실연을 반복한다. 그만한 고통이 없으니까.

대학에서와는 반대로 인문학, 글쓰기 교실 열풍이다. 비싼 가격, 강사의 인지도, 장소의 불편함도 아랑곳없다. 어딜 가나 정원 초과다. 얼마 전 내가 했던 강의는 애초 언론사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10대부터 80대까지 일반인이 몰렸다. 정작 ‘취준생’은 20%, 괜히 그들에게 미안했다. 논객, 전문가, 비평가들이 즐비하다. 자비 출판도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나는 여성학 강의를 할 때 글쓰기를 권하는데, 자기 객관화, 치유… 이런 차원은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의 인간 활동 중 글쓰기가 공정성의 최후 보루라는 생각에서다. 물론 완전한 평등은 없다. 그러나 첫째, 가장 비용이 적게 든다. 책, 노트북, 펜, 종이. 도서관에서 조달할 수 있다(운동이나 음악 장비를 생각해보라). 둘째, 비교적 나이와 상관없다(50살에 피겨스케이팅은…). 셋째, 평가가 공정한 편이다(좋은 글은 합의된다). 넷째, 혼자 하는 것이어서 관계의 정치에 덜 신경 써도 된다. 다섯째, 나의 약점, 열등감, 소수자성이 모두 자원이 된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과 먹고사는 일이 일치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드물다. 글쓰기로 생계를 삼으려면? 갑자기 그 많던 필자가 없어진다. 나는 필자 소개 부탁을 자주 받는데, 아주 지옥이다. 편집자, 당사자 다 불만. 결국 양쪽에서 나만 욕먹는다. 매체의 범람에 비해 막상 훈련된 혹은 전문 분야의 필자는 많지 않다. 또 그런 필자가 되려면, 최소 10년 이상 하루에 8시간 이상 독서와 습작이 필요하다. 최소다. 게다가 “타고나야 한다”느니 어쩌니 옵션이 붙는다.

조지프 앤턴은 이렇게 말했다. “책을 쓰는 일은 파우스트의 계약과는 정반대다. 일상생활은 아예 포기하거나 지리멸렬을 각오해야 한다.” 조지프 앤턴? 살만 루슈디다. <악마의 시> 이후 13년간 전 지구적 수배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글을 썼다. 그가 좋아하는 조지프 콘래드와 안톤 체호프의 이름을 합쳤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