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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나를 위한 거울을 깨라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5-10-06

전세계를 애도의 물결로 넘치게 했던 시리아 난민 소년의 사진. 한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연일 사진을 올리며 에이란을 추모했다. 그러나 난데없이 부끄러움이 치받쳤다. 쉽사리 그 애도 행렬에 동참할 수 없었다.

과연 시리아 난민 소년이 한국에서 그런 비극을 맞이했어도 우리는 그렇게 슬픔에 전염됐을까? 세계에서 난민에 가장 박하기로 유명한 여기 한국, 시리아 난민 신청자 수백명 중 단 3명만 허용한 바늘귀 나라에서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자스민에게 필리핀으로 돌아가라 윽박지르고, 이주 어린이를 위한 법안에 태연하게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여기, 지독한, 인종차별국에서 시리아 난민 소년에게 보내는 연민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걸까.

애도를 표하는 사람들의 ‘선의’를 믿고 싶지만, 어쩌면 우리는 연말 구세군 냄비에 던져넣는 동전으로 가난한 타인에 대한 1년치 무관심을 면책받는 것처럼, 시리아 소년 사진에 대한 연민으로 잔인한 현실에 대한 무관심의 알리바이를 구한 건 아니었을까?

마치 굶어 죽어가는 북극곰 사진에 애달파하며 분노하지만, 정작 원전, 밀양, 케이블카, 4대강 등 생태계 파괴에 여념이 없는 이곳의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같은 감정의 경로는 아닐까? 직접적인 ‘나의 의제’가 되지 못하는 연민, 삶의 변화를 추동하지 못한 채 그저 소비되기에 급급한 애도의 운명은 어쩌면 이렇게 망각과 무관심을 위한 면죄부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연민이 마주보는 것은 타인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일 것이다. 자기 양심과 눈물에 자족하는 값싼 연민의 거울.

누군가 말했다. “SNS에는 연민과 분노가 넘쳐흐르는데, 세상은 왜 이럴까?” 연민과 분노, 어느 순간부터 이 감정들은 자기지시적인 거울왕국의 포로가 된 것만 같다. 내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어떤 표징으로서의 연민, 내가 얼마나 정의로운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한 자기만족의 분노. 그 탓에 불합리해 보이는 사건, 사고들이 발생할 때마다 개떼처럼 몰려가 분노를 활활 불태우며 자기자신이 얼마나 정의로운지,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른지를 열렬히 게워놓고 삽시간에 망각의 모래알로 흩어져버리는 게 아닐까.

사건의 발생, 애도와 공분, 그리고 소진과 망각이 계속 반복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폐쇄된 경로. 물론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정치화되지 못하는 공분은 그저 스펙터클의 환영이다. 자기의제로 육화되지 못하는 애도는 그저 스캔들일 뿐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그렇게 자기지시의 세계 안에 갇혀버렸다. 정말로 중요한 건 어쩌면 필름누아르의 엔딩에 나오는 장면처럼, 방아쇠를 당겨 사방의 거울을 깨고 자신이 갇혀 있다는 걸 먼저 깨닫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