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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김영삼과 변호인 노무현, 응답하라 1988
주성철 2015-11-27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문득 개인적인 ‘응답하라 1988’ 기억이 떠올랐다. 먼저 세상을 뜬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 동구에서 출마하여 허삼수를 꺾고 화려하게 정치권에 데뷔한 1988년 13대 총선 얘기다. 당시 ‘변호인’ 노무현을 ‘정치인’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김영삼이었다. 당시 나는 부산진구 거주민이었지만, 동구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친구들도 많았기에 그 기억이 꽤 선명하다. 결정적으로 허삼수가 중학교 선배였다. 그가 아침 조회 때 교장의 소개로 단상에 올라 만세 삼창을 했던 기억도 난다.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힘차게 만세를 외쳤던 이유는, 그가 전교생에게 단팥빵을 돌렸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잘 참는 성격이었던 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단팥빵을 꼭 쥐고는 목 놓아 허삼수를 외쳤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하지만 과거 언론 통폐합을 총괄한 5공화국의 실세였던 허삼수는 투표권도 없는 ‘얼라’들에게 빵을 돌렸기 때문일까, 무명의 인권변호사 출신 노무현 후보에게 장렬하게 패했다.

당시 노무현이 지원 유세에 나선 김영삼과 함께 시장을 들러 초등학교에서 연설을 한다는 소식에 동네는 들썩거렸다.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김영삼 슨상님하고 악수했다”는 것이 큰 자랑거리였고 “노무혀이 진짜 말 잘하드라”라며 기뻐했다. 당시 포스터 문구도 ‘사람 사는 세상’이었다. 민정당 허삼수 후보가 연설을 할 차례가 됐을 때는 ‘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라는 태도로 거의 몽땅 운동장을 떠나버렸다. 이제는 믿기 힘들 정도로 부산경남 지역의 ‘야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자랑스러운 그해, 5공 비리와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청문회에서 노무현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민자당으로의 김영삼의 삼당합당 이후 있었던 1992년 14대 총선 재대결에서는 노무현이 민자당 허삼수 후보에게 지고 만다. 우째 이런 일이.

완전히 잊고 지내던 누군가의 사망 소식에, 복면을 쓰고 마감 중이던 취재팀은 오만 가지 상념에 휩싸였다. 그보다 앞서 우리를 충격에 빠트린 파리 테러 사건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주 특집은 일종의 ‘가을날 유럽 시네마 투어’처럼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2개의 기행문이었으나, 정지혜 기자와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 모두 파리로부터 귀국 후 얼마 안 있어 파리 테러 소식을 접한 것이다. 애초의 늦가을 향기 물씬 풍기는 특집으로 구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 수많은 죽음들 앞에서 또 한번 멍해진 뉴스는 ‘메르스 사태 종식’이다. 요즘 분위기나 계절 탓도 있겠지만, 마치 마지막 80번째 확진 환자의 죽음을 기다려왔다는 듯 사태 종식을 선언하는 모습이 왠지 잔인하게 느껴진 것이다. 누군가는 그 환자가 내년까지 생존해 있길 바라지 않았을 거란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끝으로, 몇달 전의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경우도 있었다. <만춘>(1949), <동경 이야기>(1953) 등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로 기억되는 하라 세쓰코가 지난 9월5일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영화에서 어떤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하루하루의 일상으로서 기억되는 배우의 죽음이라 그 울림이 더 크다. 주말에는 <만춘>을 다시 꺼내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