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공주를 웃겨라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김남희(일러스트레이션) 2015-12-01

그림 형제의 동화 <황금 거위>에는 ‘웃지 않는 공주’가 등장한다. 걱정이 된 왕은 공주를 웃기는 사람에게 공주와의 결혼을 약속한다. 수많은 구애자들의 실패 끝에, 욕심을 부리느라 황금 거위에 줄지어 손이 붙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고야 공주의 봉인된 웃음이 터지게 된다.

웃지 않는 공주와 여왕에 관한 민담과 동화는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공주를 웃긴 것은 거지, 두꺼비, 때론 어떤 특정한 상황이 되기도 한다. 어느 잔혹동화에서는 공주를 웃기려고 줄타기를 하던 광대가 발을 헛디뎌 목이 부러진다. 그제야 공주가 깔깔 웃는다.

짐작건대 ‘웃지 않는 공주’ 이야기는 웃음을 추방한 근엄한 중세 권력에 대한 민중의 풍자에서 비롯됐을 거다. “예수는 웃지 않았다”는 통설에 기반해 웃음을 금지한 중세 엄숙주의에 대한 조롱과 해학.

하지만 이 우화는 실제 역사에도 등장한다. 공주 대신 왕후다. 중국 주나라 유왕은 포나라를 정벌하고, 아름다운 ‘포사’를 얻게 된다. 포사에 빠진 유왕은 정실을 폐하고, 포사를 왕후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포사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난 유왕은 우연히 비단 찢어지는 소리에 포사가 웃는 걸 보고, 전국의 비단을 공출해 계속 찢게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잘못 올려진 봉화와 북소리에 전쟁이 난 줄 알고 전국의 제후들이 나라를 구하겠다고 헛걸음하는 걸 본 포사가 큰 소리로 웃는다. 이에 감복한 유왕은 그때부터 ‘가상 전쟁’을 일으켰다. 거짓으로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계속 헛걸음치게 만든 것이다.

반복된 거짓말의 결과는 어땠을까? 결국 유왕의 폭정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반란이 일어났다. 유왕은 다급하게 진짜 봉화를 올리고 군대를 소집하지만, 제후들은 또 거짓말인 줄 알고 오지 않았다. 유왕은 죽임을 당했고, 포사는 반란군에게 납치됐다. 덕분에 주나라의 패망은 조금 더 앞당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 여기 한국에도 웃지 않는 공주가 있다. 이 효심 가득한 무표정의 공주를 웃게 하는 것은 딱 하나, ‘국정교과서’다. 아비의 영광을 새겨넣는 국정교과서라면 공주는 해맑게 웃을 수 있다. 권력과 공천권에 목마른 신하들은 공주를 웃기라는 이 지상명령을 받들어 ‘교과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국민들을 혼이 나간 비정상으로 몰더라도, 전국의 역사학자와 교사들이 한목소리로 반대해도, <뉴욕 타임스> 등의 해외 언론이 비아냥대도, 살인적인 물대포로 칠십 노인을 사경을 헤매게 해도 그저 국정교과서 발간에 혈안이다. 공주가 웃어야 자신들이 살기 때문이다. 독재시대를 미화해야 그들이 살기 때문이다.

옷 바꿔 입으며 세계 여행밖에 할 줄 모르는 공주의 ‘웃음’을 위해 한국을 잔혹동화 속으로 구겨넣는 저 정치 광대들은 미안하지만, 유왕의 교훈을 새겨들어야 할 거다. 우주는 결코 당신들을 돕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