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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동주>와 <귀향>의 의미 있는 흥행을 응원하며
주성철 2016-02-26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는 바로 <쉽게 씌어진 시>다. 어두운 현실에 대한 고뇌와 자기성찰을 통한 극복 의지를 담고 있다, 고 수업시간에 배웠던 것 같다. 윤동주가 걸어가는 생의 여러 국면에 시를 ‘들려주는’ 구조를 취한 <동주>에서, 이 시는 언제 들려올까 궁금했다. 또 좋아했던 구절은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였기에 윤동주가 남의 나라 일본에서 머무르던 그 고독의 시간에 오버랩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주(강하늘)와 몽규(박정민)가 엇갈리며 일본군에 잡혀갈 때, 바로 내가 예상했던 그 장면에서 들려온 시는 <자화상>이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알다시피 <자화상>은 그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인 1939년에 씌어진 시다. 그리고 이준익 감독은 우리 모두 동주의 자화상으로 느낀 그 표현들을 동주가 아닌 몽규라는 다른 사나이의 뒷모습에 걸쳐놓았다. 적어도 관객에게는 미지의 인물인 몽규에다 우물에 비친 동주의 자화상을 포개놓는 신선한 연출이자 대담한 배치였다. 그렇게 동주 또한 얼마 안 있어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가슴 아프게도 윤동주가 어떠한 극도의 절망 속에서 숨을 거두었는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몽규의 신춘문예 당선을 부러워하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던 그는 이른바 ‘시인’이라는 직함을 가져보기도 전에 감옥에 끌려갔고, 광복이 찾아오기 불과 6개월 전에 세상을 떴다. 과연 그는 후손들이 자신을 시인이라 부르는 것을 알고 있을까.

최근 <씨네21>에서는 최동훈의 <암살>을 비롯해 박찬욱의 <아가씨>, 김지운의 <밀정>, 류승완의 <군함도> 등 여러 감독들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 이끌리는 현상을 주목해왔는데, 그러한 기억은 <동주>는 물론 <귀향>에도 드리워진다. 조정래 감독은 거기서 더 나아가 성폭력피해여성과 위안부 할머니의 만남 등 거의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현재 시제와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래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세월호를 떠올리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평생 짊어지고 괴로워했던 것은 당시의 친구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내버려두고 왔다는 죄책감이었다. 게다가 씻김굿이 펼쳐지는 양평 두물머리는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여러모로 진도 팽목항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더 울컥하게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그 아름다운 두물머리 또한 개발로 인하여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오래전에 들었다. 이제 대부분 연세가 80대 후반 이상인,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도 이제 44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둘 희미해져가고 있고, 손써볼 시간은 줄어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까워할 시간도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