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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142번 버스의 추억

이사한 동네에는 3개의 버스노선이 있다. 둘은 한강을 건너 강남의 일터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142번 버스다. 이 버스는 이사 전에 살던 동네도 지나간다. 기억이 맞다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 몇년간 등•하교 때 타던 버스가 142번이었다. 노선은 현재와 다르다. 나는 시월유신이 있던 1972년 연희동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직후 부모님은 당시 서울의 가장 변두리인 상암동으로 이사했다. 시골과 다름없던 그곳에서 30년 후 월드컵이 열리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버님은 좀 더 나은 학교에 보내겠다는 생각으로, 형제를 상암동이 아닌 신촌의 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돌이켜보면 신촌에 사는 친구 분의 주소로 위장전입시킨 것 같다(주민등록법 위반). 아버님의 무용담에 따르면, 동사무소 직원을 6천원으로 구워삶아 나를 나이보다 일찍 입학시켰다(뇌물수수). 나는 발육도 늦어서 반에서 가장 작은 편이었는데, 건강기록부에는 ‘신장 100센티미터’라고 기록되었다. 나는 걸을 때 손에 쥔 책가방이 자주 땅에 끌렸다. 신촌의 초등학교로 전학시킬 때 아버님을 만난 담임선생님은 “유치원에 보냈어야지, 무슨 생각으로 학교에 보냈느냐”고 꾸짖었다.

당시 상암동에는 버스가 없었다. 나는 30분을 걸어 가좌동의 큰 도로까지 갔다. 그곳에서 142번을 타고 모래내, 연희동을 거쳐 연대 앞에서 내렸다. 몇년 후 상암동에 5번 버스가 다닐 때까지 그렇게 다녔는데, 142번을 생각하면 두 기억이 떠오른다. 한번은 이사한 직후인 1학년 초였다. 등교하는데, 그날도 엄청난 만원버스였다. 나는 어른들 허리춤에서 숨도 못 쉬던 형편이라 사람들을 헤치고 내리지 못했다. 어디에 내려야 하는지는 배웠으나 못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배우지 못한 터라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치자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다음 정류장에 내려 학교를 찾아갈 자신이 없어서, 종점에서 버스가 돌아오리라는 생각으로 계속 타고 갔다. 어린 마음에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나는 상도동까지 갔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선생님이 “왜 결석했느냐”고 물었는데, 어떻게 설명할지 몰랐던 나는 “아주 멀리 갔었다”고만 했다.

또 한번은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문제가 생겼다. 집에서 20여분 걸어가 개천을 건너야 했는데,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잠시 멈춰 개천에 힘껏 돌을 던졌다. 이때 손에 함께 쥐고 있던 10원 동전이 같이 개천으로 날아갔다. 늘 왕복 버스비 20원만 받아 등교하던 나는 혼비백산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은 왜 여분의 돈을 주지 않고 학교에 보냈는지 모르겠다(아동학대). 나는 학교에서 빌리자는 생각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늦었지만 등교를 했다.

아버님의 사업이 잘되면서 10년 후 상암동을 떠났다. 지금 상암동은 미래도시 같다. 나는 상암동의 방송국, 영화사, 영상자료원에 가면 예전에 살던 집, 뛰놀던 골목, 외로울 때 올랐던 야산을 알아보려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완전히 재창조된 공간에서 아무 흔적도 찾지 못했다. 10원을 삼킨 개천만 가까스로 알아보았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가끔, “동전은 지금 어디 있을까” 생각해본다. 토요일에는 영상자료원에서 오래된 영화를 보아야겠다. 그리고 봄볕이 내리쬐는 파라솔에서 얼음커피를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