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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원의 노래가 끝났지만] 보리차가 식기 전에 빨리 봄날로 가자
윤덕원(가수) 2022-04-28

일러스트레이션 EEWHA

‘천하제일 보리차 대회’라는 요상한 이름을 가진 콘테스트가 있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2022년 제19회 한국대중음악상(이하 한대음)에서 최우수 포크-노래 부문에서 수상한 것을 기념해서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의 <보리차>를 부르거나 재창조해서 인터넷에 올리는 대회인데, 주최측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스티커나 컵, LP음반 등을 걸고 참가를 독려했고 기념 컵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나 역시 어느새 그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

마침 한대음 수상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같은 시기에 천용성 보컬 버전의 <보리차> 음원이 공개되었다. 기존에 발표된 <보리차>는 강말금 배우가 보컬을 맡았는데, 천용성 보컬 버전이 발매됨으로써 음역대가 다양한 참가자들의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 용성씨 버전의 반주 트랙에 노래를 시도해보았으나 생각보다 음역대가 낮아 강말금 배우가 부른 음계를 바탕으로 콘테스트에 참여했다.

출전 자격에 제한은 없었지만 아무리 내가 피지컬로 승부하는 편은 아니더라도 현업 뮤지션으로서 음악적 완성도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직접 반주를 하며 연주해보니 하루 정도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았다. 여성 음역대에 맞추어 연습하다보니 살짝 음을 내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래 이 기회에 나일론 기타 주법을 좀 연습해야겠군’ 하고 생각하며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바닥에서 목소리로는 누구나 한수 접어두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뮤지션 ‘시와’님이 첫 번째로 영상을 올린 것이다. 숙련된 유튜브 동영상 제작 경험으로 만들어진 안정적 구도와 세련된 흑백 연출에 그의 목소리가 더해진 까닭일까, 이미 조회수는 수천건이 넘어가고 있었다. 트위터라는 플랫폼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건 정말 강력한 임팩트였다. 게다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까지 동시에 올리는 치밀함까지. 항상 만만치 않은 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생각 이상이지 않은가.

좀 치사하지만 내가 먼저 대회의 첫 테이프를 끊어서 강한 인상을 주고 싶었는데 비겁하게도 전문 음악인이 이런 팬 대상 콘테스트에 처음으로 응모하다니! 인디 음악 신에 공정함이란 어디로 간 것일까. 평정심을 잃은 채로 카메라를 켜서 연주를 시작했다. 한시가 급했다. 마이크를 연결할 틈도 없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세번이나 연주했는데 자꾸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더 미룰 순 없었다. 이 순간에도 시와님의 영상 조회수는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세 번째 연주한 영상을 업로드할 수밖에 없었다. 업로드를 마치자마자 용량 제한을 알리는 경고 메시지가 떴다. 다시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조바심이 났다. 인터넷 검색으로 해결 방법을 알아보고 있는 사이에도 시와님의 <보리차>는 SNS상에서 뜨거운 감자, 아니 뜨거운 보리차가 되고 있었다. ‘나도 코인 투자로 돈을 벌고 싶다’고 외치는 청년들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보리코인’에 나도 탑승할 거야!!

허겁지겁 업로드가 끝나고 영상 설명을 쓰면서 갑자기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같은 ‘…차’ 계열 노래(예: <유자차>)로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동료의 작품을 응원하고자 하는 처음의 숭고한 마음은 잊고 어느새 물욕과 명예욕에 눈이 멀어 있는 자신을 돌아보니 <보리차>의 가사가 떠올랐다. 나의 이런 흠과 실수도 곧 드러나고 말겠지…. 만난 적 없는 용성씨 미안해요. 하지만 ‘작성하기’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만은 진심이었어요.

용성씨는 이런 내 마음도 모르는 채 영상을 공유하며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그사이에 시간은 보리차가 빨리 식는 계절을 3월 말까지 유지하다가 잔인한 4월을 맞아 봄날로 가는 듯했으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4월 중순) 이미 여름이 온 듯하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도 있겠지만 옹졸했던 나의 마음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아직도 ‘천하제일 보리차 대회’의 수상작은 밝혀지지 않았다. 과연 보리차를 담아 마셨을 때 가장 맛있다는 천용성 컵이 나의 손안에 들어올지, 아니면 참가상인 스티커만이 나를 쓸쓸히 위로할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뭐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봄날은 더욱 짧아질 것이고 <유자차>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보리차>를 흥얼거려본다.

<보리차> _천용성

보리차가 빨리 식는 계절

오랜만에 만난 너의 머린 짧았고

우리는 오래된 의식처럼

따뜻한 밥을 먹었지

왠지 조금 먼 듯한 기분이야

내색하진 않았지만

난 모르는 척 철없는 말

끝이 없는 농담 시시한 아이처럼

너는 나보다 낫고 발라서

나의 흠과 실수를 다 알 것 같아서

아니 항상 난 네 앞에 서면

행복한 마음만큼 무서웠어

혹시 만약 너가 묻는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걱정스러워

테두리가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풀 죽은 잎사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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